정철상 복자화. 정철상은 아버지 정약종과 장인 홍교만, 숙부 정약전과 정약용의 옥바라지를 하다 체포돼 아버지와 장인이 한날한시에 순교했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약 20살 나이로 순교했다.
정치적 배경과 맞물려 발생한 ‘신유박해’
제22대 조선 국왕 정조 이산이 1800년 6월 28일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노론 벽파에 속한 정순왕후인 대왕대비 김씨(1745~1805)가 섭정했다.
정순왕후는 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 조선 가톨릭교회 금교령을 공포하고, 국가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천주학쟁이”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였다. 이를 한국 교회에서는 1801년 신유년에 일어난 박해라 하여 ‘신유박해’라 한다. 반면 조선 왕조는 신유년에 벌어진 사학에 대한 형사사건이라 해서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 한다.
정순왕후가 조선의 가톨릭교회를 뿌리 뽑고자 한 배경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근원적 가톨릭교회 가르침을 ‘이단’ 곧 정학(正學)인 주자 성리학의 가르침에 어긋난 ‘사학’(邪學)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를 박해할 때마다 내세운 조선 왕조의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명분이 바로 답을 제시한다. 위정척사는 정학인 성리학을 보호하기 위해 사학인 가톨릭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신유박해는 정순왕후의 즉흥적인 결단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조선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의 불씨가 조금씩 여기저기서 지펴지고 있었다. 우선 정치 쪽으로는 남인(南人) 영수 채제공이 1799년 죽은 데 이어, 이듬해 정조가 사망함으로써 박해를 어느 정도 막아줄 배경이 없어져 버렸다. 또 사상 면에선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체포 과정에서 발생한 을묘박해 이후 반서학 곧 가톨릭교회를 반대하는 사상이 정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사회 면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움으로써 조선 사회의 윤리 체계와 사회질서를 무너뜨려 이를 박멸해야 한다는 인식이 위정자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조선 그리스도인에 대한 지배 계층의 불만이 고조에 달했을 때 이를 터뜨릴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1801년 2월 21일(음력 1월 9일) 김여삼의 밀고로 조선 가톨릭교회 총회장 최창현(요한)이 체포돼 포청으로 끌려온 것이다. 이 사건으로 정순왕후는 바로 다음날 전국의 수령은 ‘오가작통법’을 발동, 모든 그리스도인을 잡아들여 코를 베는 형벌을 가하고 그 종자를 없애버리라는 내용의 가톨릭 금교령을 내렸다.
박해가 시작된 지 9일 만인 1801년 3월 3일(음력 1월 19일) 불난 집에 기름 붓는 사건이 또 터졌다. 바로 ‘책롱(冊籠)사건’이다. 명도회장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 머슴 임대인을 시켜 포천 홍교만(프란치스코)의 집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책 농짝을 한양 황사영(알렉시오)의 집으로 옮기다 한성부 관원에게 발각된 것이다. 농짝에는 가톨릭 서적과 성물, 주문모 신부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이 일로 정약종·약전·약용 형제와 이승훈, 이가환, 홍낙민(루카) 등이 체포됐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한 아버지와 장인
이번 호에 소개할 청년 그리스도인은 복자 정철상(가롤로, ?~1801)이다. 그는 아버지 정약종과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성 유 체칠리아는 새어머니이고, 성 정하상(바오로)과 성 정정혜(엘리사벳)는 배다른 남매다.
정철상은 경기도 광주 능내리 마현(마재)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에 서원부원군 한확의 묘가 있어 능내(陵內)라 했고, 말을 타고 광주 분원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어서 마현(馬峴) 또는 마재(馬峙)라 불렀다. 풀이하면 ‘능 안에 있는 말티고개 마을’이다.
정철상은 아버지 정약종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웠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1797년 전후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막내딸과 혼인했다. 아버지와 장인은 1801년 4월 8일(음 2월 26일) 최창현, 최필공, 홍낙민, 이승훈과 함께 한날한시에 서소문 형장에서 순교했다.
주문모 신부 비밀 함구·순교
정철상은 아버지와 장인이 순교하던 날 의금부에 체포돼 형조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아버지와 장인의 주검을 수습도 못 한 채 붙잡힌 것이다. 그가 이처럼 비통한 날에 잡힌 것은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아버지와 장인, 숙부 정약전과 정약용의 옥바라지를 했기 때문이다.
정철상이 주문모 신부와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관헌은 주 신부의 은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혹독하게 고문했다. 그는 모진 고문을 이겨내며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한 달 이상 고문에 시달리던 정철상은 사형선고를 받고 1801년 5월 14일(음 4월 2일) 아버지와 장인이 처형됐던 서소문 밖 형장 그 자리에서 최필제(베드로), 윤운혜(루치아)와 함께 순교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순교자비망기」에는 이때 정철상의 나이가 약 20세였다고 기록돼 있다.
형조가 작성한 정철상의 사형 선고문에는 “너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집안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요사한 스승(주문모 신부를 가리킴)을 보호하려고 송곳으로 찔러도 말하지 않았다. (?) 주문모를 맞이하여 거처하도록 하고, 흉악한 무리를 불러 모임을 했으며, 개나 돼지처럼 행동하면서 인간의 윤리를 무너뜨린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