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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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복음] 전능하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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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오사와 태너 작 ‘지붕 위의 그리스도와 니코데모’.

장남에 대한 편애에 불만을 가진 차남이 엄마에게 물었다. ‘아들 맞나요?’ 엄마는 ‘너는 아들이지’라고 답한다. 두 아들의 엄마에게 장남·차남은 더한·덜한 아들로 가를 수 없는 똑같은 아들이다. ‘장남’, ‘차남’, 둘의 연결고리인 ‘형제’는 삼위일체 이해에 유익하다. 장남·차남·형제에 성부·성자·성령을 대입하면, 다음의 진술이 가능하다. ‘장남이 아닌’ 차남·형제가 ‘장남과 똑같이’ 아들인 것처럼, ‘성부가 아닌’ 성자·성령은 ‘성부와 똑같이’ 하느님(주님)이다. 단 아들보다 선재(先在)한 엄마 편에는 복수형 ‘아들들’인 반면, 선재를 구상할 수 없는 ‘창조되지 않은’ 성부·성자·성령은 단수형 ‘하느님’이다.

초대 교회는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삼위일체를 ‘믿을 교리’로 정립하였다. 이 과정 중 두 반론이 등장했다. 하나는 유다교의 경직된 유일신론에 입각한 성자·성령의 신성에 대한 부정이다. 이는 성부가 옷을 바꾸어 입듯이 성자와 성령으로 변형하여 한시적으로 활동했다는 견해와 연계한다. 다른 하나는 신성의 정도로 서열을 매긴 종속 관계다. 이는 다신론 배경의 선교지에서 신성이 공인된 성자·성령이 성부보다 덜한 신성을 가진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그리스 철학 용어를 도입하여 장남·차남·형제처럼 ‘서로 똑같지 않은’ 성부·성자·성령을 ‘위격’으로, 아들처럼 ‘서로 다르지 않은’ 하느님을 ‘실체’로 지칭하였다.

유일신론의 기조(1티모 2,5 참조)를 고수한 신약성경은 성자·성령의 신성을 명백히 진술한다. 성자의 육화로 출현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다.(콜로 2,9 참조) 그리스도는 아버지-하느님을 ‘들려주고’ 아들-하느님을 ‘보여주며’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주듯 영-하느님을 ‘보내준다.’ 성자를 통해 성부로부터 파견된 성령은 하느님이다.(1코린 2,10 참조) 성령은 아버지-하느님을 ‘부르게’ 하고 아들-하느님을 ‘기억하고 고백하게’ 하며 성부와 성자를 증언할 힘을 부여하여 ‘활동하게’ 한다.(사도 1,8 참조)

현대 교회는 삼위일체에 대한 연역적 설명보다 세 위격을 표본으로 교회가 중시하는 공동체성을 해명하는 귀납적 설명을 선호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핵심은 공동체성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력 행사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의 협업·분업 양식이 아니라 세 위격의 ‘사랑에 기초한 자기 비움’(필리 2,7 참조)이 창출한 전능성의 표출 양식이다. 아들에게 권한·책임을 전적으로 맡긴 아버지(요한 3,17 참조)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려고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마태 26,42 참조), ‘아버지와 똑같이’ 영에게 권한·책임을 전적으로 맡긴 아들(요한 15,26 참조)과 ‘아들과 똑같이’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하는 영(티토 3,6 참조)이다.

경청과 소통이란 감투에 숨겨진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 행태, 대화와 친교란 명패에 가려진 ‘꼰대’(훈계·지시) 행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력 행사 방식에 부합될 수 없다. 조직 문화와 서열 구조의 편 가르기, 줄 세우기에 능숙한 이는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왜곡할 수 있다. 삼위일체는 인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경험할 수 없기에 ‘신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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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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