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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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죽음에 이르는 단 하나의 동행

23. 김훈 「저만치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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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제미나이 제작



죽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독한 여정이지만
믿음과 사랑은
그 길을 끝까지 배웅한다




책 「저만치 혼자서」를 읽을 당시 시어머니는 급격히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영양 캔조차 마시지 못하고 물만 마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쩌면 어머니가 돌아가실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말 돌아가시는 거 아닐까?’하는 생각과 상복을 입은 내 모습이 잠깐 스치듯 머릿속에서 지나갔고, 일주일 뒤 나는 진짜로 상복을 입었다.

동명의 소설집에 수록된 김훈 작가의 단편소설 「저만치 혼자서」는 늙은 수녀들이 모이는 ‘도라지수녀원’ 이야기다. 늙은 수녀들은 거기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바로 옆 묘지에 묻힌다. 즉 그곳은 호스피스 수녀원이다. 도라지수녀원의 시작은 마가레트 수녀였다. 성녀 마가레트는 전쟁 중에 죽어가는 이들의 마지막을 살폈다. 더럽고 아픈 이들을 깨끗하게 씻기고, 임종을 지키고, 기도했다. 자신이 망자보다 나중에 가니 망자가 하늘로 가는 길을 배웅한다고 말했지만, 죽음은 배웅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도했다.

시어머니가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지면서 임종기로 들어서는 동안 이 책의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었다. 바로 “주여, 저를 이 사람보다 나중에 거두어들이시니 제가 이 사람을 배웅합니다”라는 부분이었다. 가톨릭 신자인 나는 주기적으로 냉담을 반복하면서도 부끄러움 없이 이 부분을 덥석 받아 가졌다. 그저 배웅하는 마음이었으면 했다. 나도 갈 그곳으로 먼저 가는 어머니를.

도라지수녀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낸 몇몇 수녀들 중 나는 특히 김 루치아 수녀와 손 안나 수녀가 마음에 걸렸다. 두 수녀는 도라지수녀원에서 최고 연장자였는데, 두 수녀가 기거하는 방에는 거울이 없었다. 그녀들은 거울 대신 서로를 보면서 자신의 늙은 정도를 알았고, 서로를 보면서 자신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들이 겪는 아픔에 대해 작가는 “병이라기보다는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는데, 내가 본 요양병원에서의 어머니의 날들 또한 병이라기보다는 시간이었다. 아프고 아프고 또 아프고, 외롭고 외롭고 또 외롭고. 그 시간 속에서 만약 어머니에게 종교가 있었다면, 수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찾고 또 찾을 하느님이 계셨을 텐데. 그랬다면 좀더 나았을까. 그랬다면 “먹고 죽게 약 좀 줘요”라고 의사에게 매달리지 않고 “얼른 저 좀 데려가 주세요”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을까.

수녀들의 삶은 그 자체가 기도다. 호스피스 병원에 들어선 늙은 수녀들은 먼저 간 수녀들의 장례미사에 참석하는데, 걸을 수 있는 한 끝까지 참석한다. 걸을 수 있으나 정자세로 앉지 못하는 수녀들은 벽이나 바닥에 기대어 앉아 기도한다. 기도가 삶이고 죽음이며, 기도와 함께 삶에서 죽음으로 시프트한다. 과정은 고요하고 진중하고 감히 말하자면 지난하다. 아스라이 번지는 도라지꽃의 색처럼 삶은 죽음으로 번지듯 간다. 죽음을 마주하는 모두의 그러한 생각들이 호스피스 수녀원을 도라지수녀원으로 부르게 했다.

김훈 작가가 쓴 에필로그의 제목은 ‘군말’이었다. 군말의 시작에서 작가는 “나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다”라고 말했다. 옆에 있는 누군가의 이웃으로,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쓴 글이다. 이웃의 이야기는 다감하되 현실적이다. 애정을 갖고 바라보지만, 그것은 관찰 대상자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 무력하다. 임종기에 접어든 부모를 바라보는 것은 서로의 외로움을 직면하는 일이다. 가는 사람은 혼자 가니 외롭고, 보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을 외롭게 내버려두려니 외롭다. 그리고 나중에 나도 내 부모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더 외롭다. 그 길에 종교가 있다면, 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다. 종교는 분명 죽음으로 가는 길에 동행 가능한 단 하나의 가능성이다.

시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 나는 절망했다. 삶의 완성이 죽음 같았기 때문이다. 90년 넘게 달려온 어머니의 삶, 그 삶의 끝이 죽음이라니. 육체가 한 줌 재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었고 다시 못 만날 배웅을 하는 것이 참 힘들었다. 하나 희망이 있다면,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자식들의 우애가 아주 깊었다는 것이다. 어느새 장정이 된 조카들은 본인들 몫을 톡톡히 해냈고, 함께 늙어가는 형제들은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애틋했다. 입관식을 보면서, 함께 울면서, 서로가 서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이것을, 이 장면들을 어머니가 어디선가 보고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우리는, 자식들은, 평생 부모의 사랑을 먹고산다.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 열심히 정성껏 산다. 그 습관으로 어머니가 이제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군분투했다.

저만치 어디선가 떨어져 어머니가 우리를 보고 있을지 모르니까. 어머니가 평생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던 그것, 형제들 우애 좋게 살면 더는 바랄 게 없다시던 그 말. 그 말을 지키고자 우리는 애를 썼다. 그것이 몸에 배어 어느새 습관이 되고 우리 인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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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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