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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 후 교회로 돌아와 순교로 보속한 약방 주인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24) 최필제(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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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제(베드로) 복자화. 신해박해 때 배교한 최필제는 회심 후 교회 일을 돕고 예비 신자와 신입 교우들을 가르치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다. 그는 동정 부부로 살며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교우들로부터 존경받았고, 어질고 후덕한 성품으로 그의 약방을 찾는 이들을 전교했다.


복자 최필제(베드로, 1770~1801)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부인은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4쌍의 동정 부부 가운데 한 쌍이다. 황사영(알렉시오)은 「백서」에서 “주문모 신부가 일찍이 최필제에게 탄복하고 칭찬해 말하길 ‘부부가 정결을 지키는 자로서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 아주 드문데 최필제 부부는 지조가 갈수록 굳어지고, 힘써 노력하는 것이 갈수록 부지런하니 참으로 어진 사람’이라 하였다”고 증언했다.


초기 조선 교회 지탱한 기둥 ‘약방’

최필제는 1770년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그 또한 약방을 운영하며 생활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최필공(토마스)의 사촌 동생이다. 1790년 복자 최필공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는 진실하고 후덕하며 어질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사촌 형 최필공조차 중대한 결정을 할 때마다 그의 의견을 들어본 후 행동할 정도였고, 약값이 싼데도 약재가 좋아 약국을 찾는 이 모두가 그를 신용했다.

약계(藥契)에 종사하던 조선 가톨릭 신앙공동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약방을 복음 선포의 장소로 활용했다. 약방이 사람의 왕래가 잦아 특별히 남의 시선을 끌지 않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중인 출신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양에서 약방을 운영하던 이는 최필제, 최필공과 더불어 정인혁(타대오)·현계흠(플로로)·김계완(시몬)·손경윤(제르바시오)·손경욱·손경무·손인원 등이다.

“약국은 초기 교회 조직을 떠받치고 있던 중요한 축이었다. 이들 약국이 대부분 오늘날 남대문과 중구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던 점도 흥미를 끈다. 최필공은 도저동(중구 도동), 최필제는 장흥동(중구 충무로 1가?), 손경윤은 관정동(중구 태평로 2가)과 안국동(종로구 안국동), 손경욱은 모화관(서대문구 영천동), 손인원은 남대문 밖 삼거리(중구 도동 인근), 김계완은 양대전동(서대문구 의주로 1가), 정인혁은 광통교(중구 남대문로 1가), 현계흠과 손경무는 회현동(중구 회현동)에서 약국을 열고 있었다.”(정민,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260~261쪽)

이들 대부분은 최필공으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최필공과 정인혁은 친척 간이고, 손경윤과 손경욱은 형제이고, 손경욱은 최필공의 약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손경윤·손경욱 형제의 사촌 동생 손경무는 현계흠의 사위였다.


높은 식견·신분 한계 지닌 중인, 천주교 수용

조선 후기 신분제는 양반-중인-양인-천인 체제였다. 중인은 양반에서 도태되거나 양인에서 신분이 상승한 중간층을 일컫는다. 이들이 한양 중간 지점인 청계천 일대 북촌과 남촌에 거주해 중인이라 했다고도 한다. 중인은 주로 역관·의관·율관(법률사무)·천문관·서리·향리 등으로 활동했다. 조선 후기 지배층은 중인들을 사회 불만 계급이라고 인식했다. 양반도, 평민도 아닌 중인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었던 정조는 중인들이 가톨릭 신앙에 심취할 가능성이 크고, 그들이 서학 곧 천주교에 빠지는 것은 그들 잘못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정조는 탄압하기보다는 될 수 있으면 교화시키고자 노력했다. 당시 중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의약과 통역 등 자기 직업과 관련한 전문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양반층에 버금가는 학문에 대한 교양과 사회 식견, 경제적 부유함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문화인 서양 학문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열린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도망가라는 유혹 뿌리치고 순교

최필제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최필공과 함께 체포됐으나 배교하고 석방됐다. 곧바로 회개한 그는 다시 신앙 공동체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신입 교우와 예비 신자들을 자기 집에 모아놓고 교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찾아가 성사를 받고 자주 미사에 참례했다. “새벽에 김이우의 집에 갔더니 홍문갑의 집에서 신부를 모셔와 첨례를 한다면서 벽장 안에 예수상을 걸고 장막을 드리운 채 방석 등의 물건을 펼쳐, 신부가 윗자리에 앉았고, 저희가 벌려 앉았는데, 창밖에는 김이우 집안의 여인들이 또한 앉아서 강송하였습니다.”(「사학징의」, 최필제 공초; 정민,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534쪽)

최필제는 1801년 2월 2일(음력 1800년 12월 19일) 자신의 장흥동 약방에서 신입 교우 오현달, 충주 아이 구석이, 종현의 이태랑, 생민동의 이범이 등과 함께 신앙 모임을 하다 체포됐다. 사촌 형 최필공이 체포된 지 이틀 후 벌어진 일이었다.

최필제가 형조 옥에 갇히자 그의 나이 든 아버지는 놀란 나머지 쓰러져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필제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형조 관리들은 그를 임시로 풀어주면서 넌지시 도망갈 것을 귀띔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제 발로 형조로 찾아와 옥에 다시 갇혔다. 최필제는 아버지 장례 때 몇몇 교우에게 “저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전에 제가 배교했던 일을 보속하려 합니다. 저의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라며 순교의 뜻을 밝혔다.

최필제는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1일) 한양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정철상(가롤로)·정인혁(타대오)·윤운혜(루치아)·정복혜(칸디다)·이합규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사기그릇 장수 복자 한덕운(토마스)이 그의 시신을 거두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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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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