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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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된 일 통회하며 교회 활동에 정진한 명도회원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25) 정인혁(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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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혁(타대오) 복자화. 복자 정인혁은 명도회 회원으로 자신이 운영하는 약방을 선교 거점으로 활용해 교우들과 외교인에게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했다.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가져다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 없이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하느님 나라의 건설과 떼어낼 수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고 당부하셨다. 주님의 이 당부를 이 땅에서 몸으로 실천한 이들이 바로 순교자들이다.

조선 후기 이 땅에 선포된 복음은 ‘그리스도교 복음’을 넘어 ‘사회 복음’이었다. 개인의 믿음뿐 아니라 조선 사회의 관습과 체제를 뛰어넘는 ‘새 하늘 새 땅’의 징표로 이 땅에 복음이 선포되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신분을 뛰어넘어 서로를 돌보며,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 복음이 스며들도록 열린 환경을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들은 그 삶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했다. 초기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회 복음으로 확산시킨 조직이 바로 ‘명도회’(明道會)였다.


함께 교리 공부하며 신앙 전한 조직 ‘명도회’

명도회는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는 단체로 1797년께(1799년 초라는 견해도 있음)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한양에서 설립했다. 설립 목적은 회원들이 우선 가톨릭교회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그것을 교우와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는 데 있었다. 명도회는 가톨릭 교리 공부를 통해 조직적으로 선교하는 단체였다.

명도회는 회장과 육회(六會)로 구성돼 있었다. 초대 회장은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었고, 한양 창동 홍필주(홍문갑, 필립보)의 집, 송현 홍익만(안토니오)의 집, 아현 황사영(알렉시오)의 집, 사창동 김여행의 집, 회현 현계흠(플로로)의 집, 알 수 없는 한 집(양업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차기진 박사는 수원교구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1집」에서 명례방 김이우(바르나바)의 집으로 추정함)에서 매달 첫 주일(7일)에 육회 모임을 했다.

명도회원으로는 앞서 소개된 인물들뿐 아니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김건순(요사팟)·김한빈(베드로)·윤유일(바오로)의 숙부 윤현·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최창현(요한)·최필공(토마스)·최필제(베드로)·정광수(바르나바)·이합규·남송로·최태산·손인원·조신행·이재신·강완숙(골룸바)·윤운혜(루치아),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 이인의 부인 송 마리아와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 이담의 부인 신 마리아 등이 있었다. 이번호에 소개할 인물인 복자 정인혁(타대오, ?~1801)도 명도회원이다.


배교시키겠다는 가족의 말에 풀려나 교회로

정인혁은 한양 광통교(오늘날 중구 남대문로 1가)에서 약방을 운영하던 중인이었다. 그는 백상옥과 친척인 최필제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워 1791년 입교했다. 그는 최창현에게 한글로 된 가톨릭교회 서적 5권을 빌려 읽으며 신심을 키웠다.

정인혁은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체포돼 형조로 끌려갔다. 신해년(1791년) 최필공과 최필제가 체포됐을 때 함께 잡힌 듯하다. 그는 세례받은 직후 교회 가르침대로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해 가족은 물론 집안 사람들과 갈등을 빚었다. 아버지 정도홍과 형 정사혁은 죽기를 각오하고 배교할 것을 호소하고, 친척들은 온갖 방법으로 타일렀으나 그는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포도청으로 이송돼 포도대장 앞에서 “교회가 제사를 크게 그르다고 가르치니 영원히 폐기했다”며 담대히 신앙을 증거했다.

그럼에도 관리들은 가족들이 정인혁을 회유할 수 있도록 3일 기한을 두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가 풀려나자 맏형은 형조로 가서 “우리 집안에서는 앞으로 누구도 천주학을 신봉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다짐했다. 형조는 정사혁의 말을 믿고 정인혁을 다시 부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정인혁은 더욱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지 못한 것을 통회하며 더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했다. 그는 최필공·최필제·김이우 등과 함께 교리 공부를 하며 신앙에 몰두했다.


서적 전하고 교리 가르치다 순교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는 미사에 참여하고 성사도 받았다. 또 명도회 회원이 되어 육회 조직원으로 활동하며 교우들과 외교인들에게 한글로 옮긴 교회 서적들을 전해주고 교리를 가르쳤다.

그가 운영하던 광통교 약방은 선교의 거점이었다. 양근 사람 ‘하느님의 종’ 김일호는 정인혁의 약방을 찾아가 「천주실의」를 빌려 읽고 세례를 받았다. 이후 김일호는 정약종과 황사영, 최필제 등과 교류하면서 명도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1802년 순교했다.

이러한 일들로 정인혁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있어 최필제, 이합규 등과 함께 체포됐다.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은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자신의 신앙만을 고백했다.

이에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1일) 한양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정철상(가롤로)·최필제·윤운혜·정복혜(칸디다)·이합규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아마도 그의 나이 30대 안팎이었을 것이다.

형조에서 정인혁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이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묵은 악행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매월 7일에는 동료들과 함께 신부를 데려다 미사를 봉헌하고 천주교 서적을 외웠으며, 여러 사람을 나쁜 길로 인도하고 온 세상을 미혹시켰다.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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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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