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전문가인 의사는 병을 ‘아는’ 차원뿐 아니라 병자를 ‘알아주는’ 차원으로 진료할 수 있다. “많이 아프시네요. 힘드시겠네요.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의사의 말 한마디는 병자에게 의사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고 치유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한다. 사람은 나를 ‘알려는’ 이에게 가림막을 치지만, 나를 ‘알아주려는’ 이에게 투명해진다. 나를 ‘아는’ 사람에게 느끼는 위축감·불편함과 비교하여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느끼는 해방감·편안함이 있다. 나를 ‘아는’ 사람들보다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 때문에, 내 상처를 ‘아는’ 사람들보다 내 상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굳건히 버티며 살아갈 이유가 찾아진다.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온 죄와 죽음’(로마 5,12 참조)의 근본 원인은 ‘하느님과 같은 수준의 지식에 대한 욕망’(창세 3,5-6 참조)이었다. 이는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우려는’(창세 11,4 참조) 인간 욕망을 상징하는 바벨탑으로 확대된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은 구분된다. 정보를 습득하고 축적하는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 이 한계에 대한 부정과 도발이 첫 인간의 죄였다. 인간의 지식이 ‘(누구를·무엇을) 상세히 안다’를 추구한다면, 하느님의 지식은 ‘(누구를·무엇을) 기꺼이 알아준다’를 지향한다.
알몸의 수치심을 ‘알아주신’ 하느님은 ‘가죽옷을 만들어 입힌 후에’(창세 3,21 참조)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추방한다. 하느님의 알아줌을 표명하는 ‘나는 ~을 알고 있다’(탈출 3,7 참조)는 선언은 구원 업적의 구심점으로 작동하는 하느님의 전지(全知)를 의미한다. 전지는 ‘인정·존중하는 지식’, ‘사랑하는 지식’으로 하느님의 “연민”(호세 11,8), “예지”(시편 139,6), “지혜”(1코린 1,21)와 상통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알아주신’ 하느님은 여러 예언자를 통하여, 모든 민족을 ‘알아주신’ 하느님은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히브 1,2 참조) 하느님의 알아줌은 아들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상처 입어본 사람이 상처 입은 사람을 알아주듯이, 하느님은 수난과 죽음을 겪은 아들을 통하여 인간의 아픔·슬픔·외로움·죽음을 ‘알아주셨다’. ‘다 알려는’ 한 사람으로 들어온 죄와 죽음이 물러나고, ‘다 알아주려는’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으로 화해와 생명이 세상 안에 충만하게 스며들었다.(로마 5,15 참조)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알아주는) 주님은 ‘힘센 용사처럼 곁에 계시는’ 주님이다.(예레 20,11-12 참조) 사람을 알아주시는 하느님을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 아버지’(마태 10,30 참조)로 소개한 예수님은 나를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고 당부한다.
세례성사의 은총인 하느님의 자녀 신원은 하느님이 ‘알아주는’ 소중한 존재임을 확증한다. 사람이 되신 성자 그리스도의 생애는 자녀들의 상처와 불안을 ‘알아주는’ 성부의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었고, 성령의 은사들은 성자를 통해 드러난 성부의 알아줌을 깨닫게 한다. 먼저 알아주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바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알아줌’ 곧 신앙이다.(마태 10,3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