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수·윤운혜 복자화. 정광수·윤운혜 부부는 한양 벽동 자신의 집을 주문모 신부가 미사와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전례 공간으로 내어주고 교회 서적과 성물을 제작해 교우들과 예비 신자들에게 보급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조선 왕조 시기 한양의 양반들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과 남산 기슭의 ‘남촌’에 주로 거주했다. 북촌에는 권력을 독점한 노론 가문이, 남촌에는 권력 핵심에서 멀어진 소론과 남인, 그리고 무반 가문의 양반들이 주로 거주했다.
백악산과 인왕산을 뒤로하는 경복궁 서쪽 지역 ‘서촌’에는 왕족과 권문세가들이 주로 터를 잡았고, 궁궐과 관아에 종사하는 하급 관리들도 많이 살았다. 창덕궁 동쪽 낙산 자락 일대 ‘동촌’에는 명문가와 성균관 공노비들이 거주했다.
중간 신분인 기술직 중인과 아전, 시전 상인들은 ‘상촌’ ‘중촌’ ‘하촌’에 주로 살았다. 상촌은 인왕산 기슭 일대이며, 중촌은 종로 일대, 하촌은 동대문과 광희문 일대를 가리킨다. 용산·마포·서강 등 한강 나루 일대 ‘강대’에는 뱃사람이나 객주가 주로 살았다.
신앙생활 위해 고향 떠나 한양으로 이주
복자 정광수(바르나바, ?~1802)·윤운혜(루치아, ?~1801) 부부는 1799년 고향인 경기도 여주 부곡면에서 한양 벽동으로 이사했다. 벽동은 오늘날 종로구 송현동과 사간동, 중학동에 걸쳐 있는 동네로 벽장처럼 집들이 길게 끼어있고, 다락처럼 길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벽장골’ ‘다락골’이라고도 불렀다. 양반 정광수가 중인들이 사는 중촌 벽동으로 이사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광수의 벽동 집 양 옆에는 여주 사람 최해두와 조섭(예로니모)이, 그리고 다른 한쪽 담장을 끼고 공주 사람 김홍철이 살았다.
「자책」을 쓴 최해두는 순교자 윤현의 사위이며 순교자 최창주의 조카다. 윤현의 조카가 윤유일(바오로)이다. 정광수는 윤현의 동생 윤선의 딸 윤운혜와 혼인했다. 복자 윤점혜(아가타)가 윤운혜의 언니이고, 복자 정순매(바르바라)가 정광수의 여동생이다. 이 둘은 모두 동정녀로 순교했다. 윤현은 정광수의 벽동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안국동으로 이주했다. 조섭은 정광수를 돕고 주문모 신부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웠던 조도애의 오빠다.
정광수는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 설립 초기에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제사를 거부하는 그를 나무라며 가톨릭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했다. 또 가톨릭 교우인 윤운혜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광수와 윤운혜 부부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난 것이다.
정광수 부부가 한양 벽동에 이주하게 된 것은 한양에 사는 교우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 서적을 필사하고 아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상본, 묵주 등을 만들어 교우들에게 나눠주거나 판매했다. 또 자신의 집에 교우들을 초대해 교리 공부와 기도 모임을 하곤 했다. 주일이면 주문모(야고보) 신부와 교우들이 정광수의 집으로 모여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그는 또 강완숙(골룸바)과 조시종의 집을 드나들면서 이합규, 홍문갑과 함께 예비 신자들을 가르쳤다. 이처럼 벽동 정광수·윤운혜 부부의 집은 미사와 성사를 거행하는 전례 공간이었고 교리교육 등 신앙 모임 장소였으며 교회 서적과 성물 제작 및 판매소였다.
전례·신앙 모임 장소 지원하며 성물 제작·보급
윤운혜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 한감개에서 살았으며 어머니 이 씨로부터 가톨릭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는 시부모가 조상 제사에 참여하라고 강요할 때마다 교회에서 금하는 일이므로 제사를 드릴 수 없다며 거부했다.
남편을 따라 한양으로 온 그는 교회 일을 돕고 전교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전례와 신앙 모임을 하는 주문모 신부와 강완숙·홍필주(필립보)·김계완(시몬)·홍익만(안토니오)·정복혜(칸디다) 등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지극 정성껏 섬겼다. 또 남편과 함께 성화를 그리고 나무를 깎아 묵주를 만들어 보급했다. 그리고 여종 성조이(마르타), 최조이(이사벨) 등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윤운혜는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돼 언니 윤점혜가 형조에 잡혀가자 곧 자기 부부도 체포될 것으로 판단, 남편 정광수를 피신시키고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다른 교우 집에 숨겨놓은 후 혼자 집을 지키다 그해 2월 체포됐다.
아내 뒤따라 남편도 꽃다운 나이에 순교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차례 형벌을 받은 윤운혜는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한양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정복혜·정인혁(타대오)·정철상(가롤로)·최필제(베드로)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윤운혜에 대한 형조의 사형 선고문에는 “너는 남편을 도와 함께 행동하였으며, 시댁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가톨릭 교우들과 이웃을 삼아 서로 교류하였고, 여성 교우들과 밤낮으로 얽혀 지냈으며, 교회 서적과 성화, 성물들을 비밀리에 제작해 이곳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여러 사람을 유혹해 들여온,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고 적혀 있다.
아내 윤운혜의 권유로 피신한 정광수는 포졸들의 체포망이 점차 좁혀지고 있음을 느끼고 자수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여러 차례 모진 형벌을 받았으나 단 한 명의 교우도 밀고하지 않고 배교도 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형조로 이송된 후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여주로 옮겨져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여주 관아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순교 당시 정광수의 동생 정순매가 24세였고, 윤운혜의 언니 윤점혜 또한 23세였던 것으로 보아 정광수는 20대 중후반, 윤운혜는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