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을 읽습니다」를 쓰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매우 많이 읽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것은 노년 당사자의 다양한 태도였다. 수용·감사·적응·반항·분투·정리·체념·낙관 등등. 청년기에도 장년기에도 백인백색이었던 그들은 노년기에도 그러했다. 그 깨달음으로 나는 책의 서문에 “다채로운 노년이 온다”라고 썼다. 노년이 된다고 해서 사람이 갑자기 균질해지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노년을 하나의 그룹으로 규정짓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대상화는 그 대상을 정형화하고 공통점만을 부각한다.
「죽는 게 뭐라고」의 작가 사노 요코는 시크함의 대명사다. 책 제목 밑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 “시크한 독거 작가의 죽음 철학”. 내가 느낀 사노 요코 작가는 별났다. 통통 튀면서도 시종일관 태연자약한가 하면 시크하되 발랄하다. 어느 지점에서는 좀 괴팍한 느낌도 든다. 남들은 조심스러워하고 터부시하는 죽음에 대해 거침없이 말하기 때문이다. “미남 의사에게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고 재치를 부리는 것을 보니, 그리고 본인이 시한부임을 주변에 밝히고 나서 “내 주위의 세상이 스웨터를 뒤집은 듯 친절해졌다”고 냉소와 호기를 함께 부리는 것을 보니, 작가는 정녕 괴짜다. 발랄한 괴짜.
책을 읽을수록 제목 ‘죽는 게 뭐라고’ 뒤에 ‘별거 아니야’라는 말이 따라붙어야 할 것만 같았다. 죽음 그거 별거 아니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그런 분위기다. 작가는 본인의 철학 속으로 독자를 지속적으로 끌어당긴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책의 일본어판 원제가 「죽을 의욕 가득」이라고 한다. 죽음에 대해 의욕을 갖는다? 작가는 죽음에 대해 더욱 야심 찬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재기발랄할 수 있다니, 사노 요코는 천생 예술인이지 않은가.
책은 크게 세 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암에 걸린 후 죽을 의욕을 다지는 작가의 이야기. 그리고 신경과 의사와 나눈 죽음에 대한 담론. 마지막으로 작가가 병에 걸리기 전, 그저 마음이 아팠을 때 호스피스 생활을 하면서 쓴 호스피스 입소자들에 대한 이야기. 나는 책을 보며 한동안 키득키득 웃다가, 지혜로운 담론을 읽으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고, 호스피스 입소자들의 마지막 모습들을 이야기로 읽으며 연민과 따스함을 느꼈다.
작가와 신경과 의사가 나눈 대화는 매우 인문학적이었다. 시한부 삶을 사는 작가와 의료 전문가가 나누는 죽음에 대한 담론. 그들은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인 과정, 모습과 원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사노 요코는 역시나 거침없고 솔직하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확하게 말한다. 더불어 죽음에 대한 담론을 터부시할 것이 아니라 나아가 죽음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그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철학이다. 그것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아주 어릴 때 기억이 있다. 10살 또는 11살쯤이었던 것 같다. 거실에서 엄마 옆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가 문득 죽는 게 무엇인지 깨달아 버렸다. 그래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죽으면 어떡하지?” 그리고 울었다. 나는 그저 죽음과 함께 모든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무서웠던 것 같다. 엄마는 살짝 웃으며 그리고 어이없어하면서 그런 생각하지 말고 좋은 생각을 하면서 살라고, 너는 앞으로 커서 대학도 가고 결혼도 하고 좋은 데 여행도 가고 기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그러니 기쁘고 밝은 생각만 하라고. 그렇게 어린 나를 달래주었다.
엄마는 이후에도 한동안 그 이야기를 하셨다. 민선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나도 참 별났던 것 같다. 그리고 사실 당황했을 엄마가 나름 최선의 대답을 했다고 본다. 그때 내 엄마는 30대 푸른 청춘이었는데,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준비되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철학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저 “죽으면 끝이다”, 그러니 “차 조심해라” 그런 이야기를 할밖에.
노년에 대해서라면 말년의 경제력·외모·질병·가족 그런 것들 말고 노년의 태도를 엿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소중한 경험이다. 서로의 노년에 대한 생각과 죽음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서로의 자세. 그런 것들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멋있는 누군가를 따라 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영 아니다 싶은 누군가를 보고 하지 않아야 할 어떤 태도를 마음에 새길 수도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 철학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을까.
인생을 줄곧 자기만의 철학을 갖고 살았다면 좋았을 수도 있지만, 철학적 존재로서 어린이란 상상이 잘 안 된다. 그러니 마지막 종착지인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이제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노년의 철학자가 되어 보면 어떨까. 사노 요코 작가가 훌륭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며 죽음에 대한 장벽을 낮췄듯이 우리도 훌륭한 죽음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