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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향한 혹독한 형벌 견디며 신앙 고백·순교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27) 정순매(바르바라)·문영인(비비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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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매(왼쪽)·문영인 복자화. 복자 정순매(바르바라)와 문영인(비비안나)은 동정녀로 생활하며 교회 일을 돕다 순교했다.


혼인하지 않은 동정녀, ‘패륜’ 저지른 죄인

조선 왕조는 1784년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설립된 이래 100여 년간 박해하면서 여성 그리스도인들에게 ‘통색’(通色)과 ‘동정’(童貞)을 이유로 윤리적으로 비난했다. 통색은 유교 사회에서 남녀 사이에 분별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남성과 함께 가톨릭 전례에 참여한 것을 비난한 말이다. 사람의 도리 가운데 가장 큰일이 혼인임에도 결혼을 거부하고 동정을 지키는 것은 가족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여긴 것이다.

양반이 딸을 30세가 넘도록 출가시키지 않으면 가장이 중벌을 받던 사회였다. 그래서 조선 왕조는 남녀유별(男女有別)과 내외지분(內外之分)이 엄했던 성리학의 사회 질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통색을 조선 왕조의 전통 윤리관을 파괴하는 행위로, 동정을 인간 도리를 짓밟는 패륜으로 인지해 여교우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초기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 여교우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기 위해 정결한 삶을 선택한 동정녀들이 적지 않았다. 정광수(바르나바) 여동생 정순매(바르바라), 윤운혜(루치아) 언니 윤점혜(아가타), 강완숙(골룸바) 딸 홍순희(루치아), 궁녀 문영인(비비안나), 이합규 누이 이득임, 조섭(예로니모) 누이 조도애(아나타시아), 강완숙의 여종 소명·복임·정임 그리고 김달님, 이어린아기의 딸 김경애, 박성염, 배교자 심낙훈의 동생 심아기(바르바라) 등이 강완숙의 집에서 동정녀 공동체를 꾸려 생활했다.

하지만 조선 교회 사목자들은 마냥 동정 생활을 권고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동정을 지키는 것은 ‘불충’ 또는 ‘위선’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혼인하지 않은 여교우는 외간 남자에게 납치될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었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사제들은 오히려 혼인을 권유하거나 명령했고, 심지어 동정 생활을 말리기 위해 성사를 거부하기까지 했다.(최양업 신부의 1850년 10월 1일자 서한 참조;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 194쪽)

동정녀들은 형조와 포도청, 관아에서 남들보다 더 가혹하게 다뤄졌다. 동정녀들 가운데 몇몇은 발가벗긴 채 남자 죄수만 있는 옥에 던져졌고, 형리들의 온갖 능욕과 갖은 조롱을 당해야 했다. 그들은 벌거숭이가 된 채 매 맞고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온 존재로 증거했다.


오빠 부부 따라 입교·동정녀로 수덕생활

이번 호에는 두 동정녀를 소개한다. 바로 정순매(바르바라, 1777~1801)와 문영인(비비안나, 1776~1801)이다.

정순매는 강완숙 집에서 동정녀 공동체를 이끈 윤점혜(아가타)와 사돈 간이다. 그의 올케가 윤점혜의 동생 윤운혜(루치아)이고 오빠가 정광수(바르나바)이다. 그는 경기도 여주 부곡(오늘날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인 1795년 오빠 부부(정광수·윤운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는 입교하자마자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동정을 지키고 살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오빠 부부와 한양 벽동으로 이사와 그들을 도와 교우들에게 교회 서적과 성물을 보급하는 일을 했다. 1800년 주문모 신부에게 보례를 받은 그는 사람들에게 “허가와 혼인했다가 사별했다”며 과부 행세를 하며 실제로는 사돈 윤점혜가 이끌고 있던 동정녀 공동체에 들어가 철저하게 수덕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다른 동정녀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가혹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신앙을 버릴 수 없다”며 여러 차례 신앙 고백을 했다.

정순매는 형조의 사형 판결 후 고향인 여주로 이송돼 1801년 7월 3일(음력 5월 23일) 또는 7월 4일 여주 관아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는 순교 전에 “포도청에서 모진 형벌을 받고 형조에서 엄한 문초를 당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저는 가톨릭 신앙을 너무나 좋아해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최후 진술을 남겼다.


신앙 이유로 쫓겨난 궁녀, 교회 일 돕다 체포돼

문영인은 한양 중인 집안의 셋째 딸로 7살 때인 1783년 궁녀로 뽑혔다. 그는 총명하고 글씨를 잘 써 문서 쓰는 일을 맡아 했다. 21살 되던 해인 1797년 병에 걸려 궁궐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는 강완숙(골룸바)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이듬해인 1789년 강완숙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병이 완쾌돼 다시 궁으로 들어갔으나 가톨릭 신자임이 발각돼 궁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이 일로 집에서도 쫓겨난 문영인은 한양 청석동에 집을 얻어 살면서 헌신적으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리고 성인전인 「성년광익」(聖年廣益)을 읽으면서 자신도 순교할 수 있도록 간구했다.

문영인은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체포됐다. 그는 포도청에 압송돼 혹독한 형벌을 받고 형조로 이송돼 궁녀 출신이며 동정녀란 이유로 더 가혹하게 매질을 당했다. 그는 정신이 혼미해져 얼떨결에 배교한다고 말을 뱉었으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입으로는 배척한다면서도 마음으로는 실제로 배척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 동안 독실히 믿어온 신앙인데,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했다.

문영인은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김연이(율리아나)·한신애(아가타)·최인철(이냐시오)·이현(안토니오)과 함께 한양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순교 당시 그의 목에서 젖과 같이 흰 피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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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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