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통 웃을 일이 없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도 그게 그거 같고, 시답잖은 농담 주고받을 친구 만날 시간도 내기 어렵다. 큰 뉴스든 작은 뉴스든 세상 소식은 미간 찌푸려지는 일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혐오하는 일,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일, 사람이 사람들의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일, 사람이 사람 아닌 것들을 함부로 대하는 일, 사람이 자연을 해치고 망가뜨리는 일⋯. 이런 것들이 요즘 뉴스에서 전하는 사람의 일들이다.
세상 소식을 멀리하고 자조하는 삶을 산다더라도 이 역시 웃음과는 거리가 꽤 멀다. 지나고 보니 후회스러운 일, 지금 살펴보니 엉망인 일, 앞을 내다보니 걱정스러운 일투성이다. 밥벌이의 어려움은 하는 일의 경력이 얼마만큼 쌓여야 완전히 사라지는지 알 수 없다. 물가는 오르는데 소득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돈과 상관없이 삶에 만족하며 행복을 찾고 있는가 하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다가올 시간에 쩔쩔매며 생을 보낼 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웃을 일이 뭣이 있겠는가 말이다.
첫째 아이는 자다가도 웃는다. 잠꼬대하는 것일진대 깨어있을 때는 본 적 없이 호탕하게 웃는다. 꿈속에서 좋은 일이 있는 걸까? 하긴 아이는 평소에도 잘 웃는다. 잠꼬대가 신기한 건 웃는 소리 때문이다. 어젯밤에도 아이는 한밤중에 깔깔깔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의 연원이 궁금해 아이의 꿈속에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다. 평소 아이는 소리만 내지 않을 뿐이지 잘 웃는다. 다운증후군의 특질인지, 아이만의 성격인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환하게 웃는다. 약간은 치켜 올라간 눈과 조그마한 코가 그 환한 웃음에 한몫한다. 웃음이라는 명령 아래 각자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하는 듯하다. 보기 좋은 미소다. 언제든 보고 싶은 웃음이다.
아이는 거실에서 놀다가 “등록된 차량이 들어옵니다”라는 아파트 월패드의 음성에 부리나케 현관에 나선다고 한다. 나는 팍팍한 하루가 이제야 끝나가는 걸 실감하며 주차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현관에서는 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면 첫째가 세상에서 가장 환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다녀오셨어요, 라고 묻지 않는다. 저녁 같이 먹어요, 권하지 않는다. 첫째는 언어를 최대한으로 줄인 채 그저 웃는다. 웃으며 나를 안아준다.
이런 아이를 앞에 두고, ‘아, 언어치료 시간을 늘려야 하나. 왜 이렇게 소리 내 말하지 않을까?’ 하며 걱정하는 건 팍팍한 삶의 방증 같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고, 그렇게까지 하게 되지도 않아서 아이를 안고 나도 웃는다. 대신 나는 말이 많다. “아이고 내 딸, 아빠 기다렸어? 고마워! 저녁은 잘 먹었어? 학교는 재미있었어? 치료는 잘 다녀왔고? 아, 그랬구나!” 녀석은 그저 웃기만 하거나 웅얼거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걱정은 딸의 크나큰 미소 앞에서 얼마간은 힘을 잃는다. 그 시간이 내게 큰 위로가 된다. 그 미소가 없으면 어떻게 살 수 있을지 가늠되지 않는다. 그 웃음과 미소만 있다면 나는, 종종 웃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서효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