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9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1400대 매질에도 신앙 꺾지 않은 ‘해미의 첫 순교자’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28) 복자 박취득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복자 박취득은 해미의 첫 순교자로 1400대가 넘는 매질을 당한 후 목 졸려 순교했다. 박취득 복자화.


1797년 충청도 남부 내포 하부 지역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다. 정사(丁巳)박해다.

정사박해는 그리스도인을 증오하던 한용화가 1797년 음력 윤 6월에 충청 감사로 부임해 개인적으로 일으킨 박해로 1799년까지 계속됐다. 이 박해로 가톨릭 교우 100여 명이 순교했으나 지금까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 순교자는 이도기(바오로)·방 프란치스코·박취득(라우렌시오)·원시보(야고보)·정산필(베드로)·배관겸(프란치스코)·인언민(마르티노)·이보현(프란치스코) 8명뿐이다.

정사박해를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조화진이다. 그는 정조의 명을 받고 초기 조선 가톨릭교회에 잠입해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며 신앙 공동체 조직을 염탐하고 교우들을 밀고했다. 정사박해 때 순교한 교우 상당수가 그의 밀고로 체포됐다.

필공과 보부상 행세를 하며 살갑게 교우들을 찾아와 자신들을 밀고했던 자가 조화진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교우들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자신들을 교회에 이끈 자가 조화진이라고 지목해 고발했다. 체포된 조화진은 자신이 정조의 밀명을 받은 밀고자라고 알렸으나 아무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형 체포되자 군수 찾아가 대담하게 항의

이번 호의 주인공은 ‘해미의 첫 순교자’인 복자 박취득(라우렌시오, 1769~1799)이다. 그는 충청도 홍주 면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황(사바)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워 입교했고,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형 박일득과 여러 교우가 체포돼 면천 옥에 갇히자 군수 정동표를 찾아가 “죄 없는 사람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옥에 가두니 이것이 큰 죄가 아닙니까?”라고 항의했다. 군수는 그가 박일득의 동생임을 알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칼을 씌워 혹독하게 매질했다. 그러자 박취득은 “나무칼이 너무 가벼우니 더 무거운 쇠칼로 씌워 달라”고 항변했다.

박취득 형제는 면천에서 인심 좋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일로 마을이 들썩이고 민심이 동요하자 군수 입장이 난처해졌다. 박취득이 옥에 갇힌 지 한 달쯤 됐을 때 석방령이 내려와 마침내 소요가 가라앉았다. 석방 후 그는 원시보, 방 프란치스코와 교류하면서 더 깊이 신앙생활에 빠져들었다.


문초로 인한 고통에도 교리 설명하며 견뎌

1797년 정사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 소식을 들은 박취득은 박해를 피할 곳을 찾아 몸을 숨겼지만 자기 대신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면천 관아에 자수했다. 그는 관장 앞에 나아가 문초를 받을 때마다 가톨릭 교리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그럴 때마다 화가 난 관장은 매질을 가했다. 여러 달 옥에서 지내며 수차례 가해지는 형벌에도 굽히지 않자 관장은 박취득을 홍주 감영으로 보냈다.

홍주 목사 김이호는 그에게 교회 서적과 성물, 상본 등을 직접 불사르라고 했다. 이에 박취득은 “죽어도 그렇게는 못한다”면서 주님의 강생과 공생활, 수난과 부활 등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설교했다.

화가 난 홍주 목사는 형리에게 집게로 맨살을 집어 뜯으라고 명했다. 살이 뜯기는 고통에도 박취득은 “죽어야 한다면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고, 삶은 잠시 지나는 나그네 길이요, 죽음은 본향으로 돌아감”이라며 태연하게 형벌을 참아냈다.

그러자 목사는 형리에게 “그놈의 다리를 치되, 14번을 때려도 항복하지 않거든 아주 죽여버리도록 하라”고 명했다. 죽도록 매를 맞은 박취득은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옥에 갇혔다.


해미에서 잔혹하게 순교

박취득은 홍주에서 해미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 이송됐다. 해미는 충청도 전군(全軍)을 지휘하는 병마절도사가 현감을 병행했다. 당시 해미 좌영 병마절도사 겸 현감은 정충달이었다. 그는 1798년 12월 1일 부임해 1800년 8월 18일 회령 부사로 이임할 때까지 1년 9개월간 밀고자 조화진을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박취득은 해미 감영에서 8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곤봉과 몽둥이로 1400대 넘게 매질을 당했다. 원래 조선 형법에 따르면, 하루에 곤장 100대, 태형 50대로 제한됐지만 박취득은 그 법을 훌쩍 뛰어넘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매타작 후 형리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옷을 벗긴 채 진흙 구덩이에 내던졌다. 밤새도록 비바람을 맞으며 추위의 고통을 당했어도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혼자 힘으로 일어나 옥으로 들어가 누웠다. 옥졸은 그런 박취득을 다시 매질했다. 그러자 그는 옥졸에게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지만 목을 매면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날 박취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상처가 깨끗이 나아있었다. 매질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옥졸은 그제야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 이때가 1799년 4월 3일(음력 2월 29일)이었다. 순교 당시 박취득의 나이 서른이었다.

박취득은 순교 전 어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지 궁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은 약간 희미하기는 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7-08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7. 9

마르 5장 34절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