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 A는 불치병 진단을 받은 후 하느님께 의탁하기 위해 스스로 교회에 찾아왔다. 평소 종교가 인간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던 A는 신앙 안에서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모태 신앙을 지닌 B는 불치병 진단을 받은 후 자기 신앙에 대한 회의감에 휩싸였다. 나름대로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던 B는 하느님에 대한 의심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비와 정의의 하느님은 죽음 앞에서 무신론자였다가 적극적 유신론자가 된 A와 유신론자였다가 냉소적 회의론자가 된 B 중 누구를 원하실까?
세례받고 신앙생활을 갓 시작한 C는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강렬히 체험했다. 처음 접한 성직자와 수도자의 환대와 배려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본당의 여러 신심·활동 단체에 가입한 C는 신앙생활의 기쁨과 보람을 만끽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신자의 의무를 이행하던 D는 교회 안에서 받은 상처와 실망의 축적으로 인해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다. 교회의 과제 부과형 사목 방식에 피로감을 느낀 D는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는 교회 활동을 중단하려 한다. 하느님은 열정적인 새 신자 C와 무기력한 신자 D 중 누구를 원하실까?
두 사례의 공통 물음은 ‘하느님은 둘 중 누구를 원하실까?’다. 그런데 이 물음 안에 오류가 있다. 권력자의 의중(뜻), 편(줄)에 민감한 세상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45 참조) 하느님에게 권력자 이미지를 투영하여 하느님의 의중을 강조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를 포기하게 만드는 주님 마음대로가 아니고, 상황마다 바뀌기에 눈치껏 그분의 뜻을 매번 살펴야 하는 임무도 아니며, 그분의 뜻을 잘 안다고 자처하는 특정인의 전유물도 아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요한 6,39)라고 명백하게 밝히셨다. 곧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의 뜻은 모든 이의 구원(생명)이며, 더 나아가 ‘모든 피조물의 해방과 자유’(로마 8,21 참조)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3-8 참조)에는 씨가 뿌려지는 네 가지 여건, 곧 길바닥·돌밭·가시덤불·좋은 땅이 설정된다. 이 비유의 핵심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좋은 땅을 조성해야 한다는 사명 부여가 아니라 씨 뿌리는 사람은 길바닥에든, 돌밭에든, 가시덤불에든, 좋은 땅에든 계속 씨를 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호소다. 일상의 체험이 입증하는 자명한 진실 하나는 인간에게 토양(환경)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부정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 하나는 인간에게 좋은 땅의 상태가 계속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좋은 땅이었다가 햇살이나 빗물을 충분히 받지 못해 좋지 않은 땅이 되고, 좋지 않은 땅이었다가 어떤 계기로 좋은 땅이 된다. 땅의 상태를 고려치 않는 씨 뿌리는 사람처럼, 하느님 말씀은 상황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좋은 땅과 좋지 않은 땅을 선별하지 않는 말씀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속도와 방식으로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이사 55,10) 한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코린 1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