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담 작가의 「돌보는 마음」은 소설집이다. 책에는 무수히 많은, 세상의 모든 돌봄이 나온다. 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마음, 할머니를 돌보는 손주의 마음, 노부모를 돌보는 늙은 자식의 마음 등등. 그리고 다른 돌봄도 나온다. 가족이 아닌 남에게 돌봄을 맡기는 일에 대하여. 즉 돌봄 서비스에 얽힌 사건·사고, 그리고 돌보는 자들의 갈등까지도. 돌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서늘했고 읽는 것이 힘들었다. 마치 내 이야기 같아서다. 나에게도 돌봄에 얽힌 많은 서사가 존재한다. 사랑해도 힘든 것이 돌봄이었다. 삶은 왜 이리도 돌볼 것들 투성이일까.
돌봄 세계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다각적이고 정성스러웠다. 신선했고 사실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첫 이야기 ‘대추’에는 아픈 할머니가 나온다. 할머니는 늙은 며느리에게 당당하게 간병 받고 당연하게 대소변 처리를 맡긴다. 불편하고 익숙한 장면이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아들이 있다. 할머니는 손주를 진심으로 귀애하고 손주도 그것을 잘 안다.
할머니는 어느 날, 옛집에 있는 대추나무의 대추가 너무 먹고 싶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손주는 남의 집 담을 넘어 대추를 딴다. 여기서 손주의 속마음은 짐작과 달랐다. 손주는 할머니가 대추를 먹고 빨리 병을 이겨내기를 바라지 않았다. 다만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대추를 맛있게 먹고 빨리 세상을 떠나기를 바랐다. 나는 이 장면에서 행간의 의미를 읽었다. 작가의 의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읽었다. 그래서 손주의 마음을 듣고도 냉정하다 혹은 철없다, 그런 판단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렇게 말은 하지만 손주는 할머니가 죽으면 가장 크게 울 것이다. 지금 그는 세상에서 자신의 엄마가 가장 안쓰러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본인을 사랑해준 할머니에게 정든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사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불쑥불쑥 올라올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서늘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괜찮았고 동시에 괜찮지 않았다.
돌보는 마음들은 충돌한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충돌하는 마음들을 봤다. 장남과 차남이 충돌하고 며느리와 딸이 충돌하며 조카와 삼촌이 충돌한다. 그리고 부부가 충돌한다. 도대체 가족이 뭐길래 이렇게 많은 마음이 갈등할까. 가족은 사랑이므로 사랑에 기반한 갈등은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대가족에 존재하는 돌봄의 굴레를 매우 회의적으로 보면서 자랐다. 조카인 나는, 장남과 큰며느리에게 당연한 듯 기대는 삼촌·고모들에게 때론 화가 나고 서운했다. 하지만 커서 며느리가 된 나는, 당연한 듯 내게 며느리의 역할을 기대하는 장성한 조카들의 시선이 때론 버거웠다. 그렇게 가족 안에서의 역할에 따라 치기 어린 내가, 억울한 내가, 화가 난 내가, 슬픈 내가 되었다. 반복되는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깨달았다. 이것이 가족의 생리구나.
내가 본 돌봄은 그랬다. 가족 간에 얽히고설켜서 돌봄을 주고받았다. 충돌하고 갈등하고 고마워하고 화해하고. 가족 안에서 누군가에게는 주고 다른 누군가에게서는 받았다. 그런데 돌봄이라는 것은 받을 때는 그저 행복한데, 줘야 할 때는 본전이 생각났다. 특히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향할 때는 마냥 행복했으나 아래에서 위로 갈 때는 썩 흔쾌하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자식들은 번갈아 가면서 요양병원을 드나들었다. 매주 누구든 방문자가 있도록 면회 일정을 잡는 것이 우리의 규칙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많은 자식이 한날한시에 방문하게 된 날이 있었다. 우리로서는 낭패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많은 자식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것에 매우 흥분해 누굴 먼저 찾아야 하나, 누구의 이름을 먼저 불러줘야 하나 우왕좌왕하셨다. 마치 명절에 가족이 많이 모이면 흥분해 뛰어다니는 서너 살 꼬마 조카 같았다.
그날 어머니의 기쁨과 흥분을 보며 참 기쁘고도 슬펐다. 아이를 키우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길에 뿌렸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전철역으로 달려가고 역에 내리면 택시를 잡아타고, 내 아이를 1분이라도 빨리 볼 수 있다면 택시비가 대수일까. 하지만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고백하건대 절대 버선발은 아니었다. 이런 나를 그렇게나 반겨주셨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돌봄. 돌보는 와중에 돌보는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유 중 최고는, 돌보는 마음에도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우선순위가 틀리지 않았을까, 자책하는 마음. 여러 마음이 싸우다가 ‘내가 옳다’라는 마음이 이기더라도, 자책했던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두 번째면 어떤가. 선착순으로 사은품을 받을 것도 아니고 제 자식 다음이 부모면 어떤가. 가족 안에서 윗자리로 올라오다 보니 어렴풋이 알겠다. 돌봄의 우선순위 어쩌고 하면서 마음 불편해하는 것은 다만 아랫사람의 마음이다. 윗자리에 앉으면 그런 마음은 옅어진다. 두 번째여도 세 번째여도 사랑은 사랑이고 그리움은 그리움이다. 그 반대의 마음, 미움과 원망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 이렇게 품이 넓어진 것, 이것은 확실하게 나이듦의 축복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