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이보현(프란치스코)은 덕산 황모실 사람으로 주문모 신부를 두 달간 자신의 집에 은신시킨 후 정사박해 때 체포돼 해미에서 순교했다. 이보현 복자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은 1784~1785년 사이에 자신의 고향인 여사울(오늘날 충남 예산군 신암면)을 중심으로 내포 가톨릭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의 전교 활동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덕산·면천·예산·천안·홍주 등 서부 해안 지역은 물론, 공주·청양·은진·회덕·정산 등 내륙 지역으로 전파됐다. 이번 호의 주인공인 복자 이보현(프란치스코, 1773~1800) 역시 내포 지방인 충청도 덕산 황모실(황무실) 사람이다.
덕산은 순교자의 땅이다. 정사(1797년)·신유(1801년)·정축(1817년)·기해(1839년)·병인(1866년) 박해 등 다섯 차례 환난을 겪으면서 141명(거더리 교우촌 순교자 중 홍주에 속하는 아랫 거더리 출신을 제외하면 117명)이 순교했다. 이들 중 이보현·인언민(마르티노)·정산필(베드로)·홍필주(필립보)·김사집(프란치스코)·이시임(안나)·고성대(베드로)·고성운(요셉)·정태봉(바오로)·김조이(아나스타시아) 복자와 하느님의 종 황심(토마스)이 덕산 출신이다. 또 다블뤼·오매트르·위앵·손자선(토마스) 성인과 강완숙(골룸바) 복자가 덕산에서 살았다. 이들 대부분이 해미옥과 해미의 여러 형장에서 순교했다. 오늘날 덕산 땅에는 신리·여사울·황무실 성지가 조성돼 있다.
금욕 생활에 힘쓰다 주문모 신부 모셔
이보현은 1773년 덕산 황모실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그는 청소년기에 아버지를 여읜 뒤 상실감 때문인지 제멋대로 행동하고 난폭해져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이가 바로 황심이다. 이보현은 20대 초반 황심으로부터 가톨릭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이때가 이보현의 나이 24세였다고 밝히지만, 그가 자신의 집에 주문모 신부를 숨겨줬을 때 나이가 23세여서 이보다 더 어렸을 때 세례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보현은 모든 이들의 이목을 끌 정도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성실할 뿐 아니라 행실도 반듯해졌다. 무엇보다 쾌락을 끊고 속죄를 위한 보속으로 고행과 극기를 즐겼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인지 그의 누나가 황심과 혼인했다.
이보현은 더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황심을 따라 연산(오늘날 충남 논산시 연산면)으로 이사했다. 그는 채식만 하고 기도에 전념하면서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영원을 구원하려면 금욕 생활을 하든가 순교로 목숨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자주 말했다.
수덕에만 매진하던 그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당시 조선 땅에서 유일하게 사목하던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황심에게 이끌려 그의 집에 발을 들였다. 1795년 6월 27일(음력 5월 11일) 밀고자 한영익에 의해 신원이 발각된 주 신부는 강완숙과 창동 권상문(바실리오) 집에서 은신하다 양근 등지를 거쳐 1796년 2월 연산 이보현의 집을 찾아간 것이다.
이보현은 자신의 집에서 두 달간 주 신부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그는 주 신부에게 보례를 받고, 교리도 배웠다. 그리고 주 신부가 주례하는 미사와 성사에 참여하며 더욱더 신앙심이 깊어져 갔다. 주 신부가 다시 한양으로 떠난 후 이보현은 연산과 고향 덕산 황모실 신앙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가 됐다.
매서운 형벌에도 배교 거부
1797년 8월 11일(음력 윤6월 19일) 충청 감사(관찰사)로 공주에 부임한 한용화는 도내 모든 수령에게 천주학쟁이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 ‘정사박해’라 한다. 정사박해는 1799년까지 3년 가까이 지속해 100여 명의 순교자를 배출하고, 내포 지역 가톨릭 신앙 공동체를 와해시켰다.
이보현은 정사박해가 일어나자 가족과 연산 교우들에게 날마다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하느님 나라를 얻을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라고 권면했다. 그도 체포돼 연산 관아로 압송됐다. 연산 관장이 “서학책을 내놓고 배교하라”고 하자 그는 “하느님께 대한 내용이 담겨 있어 외교인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대답해 혹독하게 매질을 당했다.
충청 감사의 명에 따라 이보현은 연산에서 고향 덕산 지역을 관할하는 해미로 이송됐다. 군을 통솔하는 해미 진영장이 현감을 겸하고 있었다. 진영장은 매서운 형벌로 이보현의 기를 꺾으려 했다. 진영장은 우선 흠씬 두들겨 팬 후 이보현에게 교우들을 밀고하고 배교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이보현은 “그들을 고발하면 나리께서 나처럼 다루실 터이니 죽어도 아무 말 하지 않겠다”면서 “신하가 임금을 배반하면 그 신하를 벌합니까, 상을 줍니까? 나리께서는 임금께 녹을 받으시니 저를 국법에 따라 처리하십시오”라고 답했다.
그는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만큼 매를 맞아도 옥에 들어오면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함께 갇힌 교우들을 격려했다.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으면 매를 쳐서 죽이라”는 충청 감사의 명을 받은 진영장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 해미 장터로 이보현을 끌고 가 매질로 참혹하게 처형했다.
27세 나이로 순교한 이보현의 시신은 며칠 뒤 교우들에 의해 거둬졌다. 이보현은 그토록 많은 매를 맞았는데도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비신자 여러 명이 입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