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명제는 선행에 대한 보상과 악행에 대한 처벌을 뜻하는 상선벌악 교리와 연결된다. 두 가지 물음이 제기된다. 첫째는 선악의 구별 기준이다. 이 구별은 특정 사안에서 명료하지만,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에서 막연하다. 차이의 공존을 부각하는 오늘날, 차이(다름)와 선악(틀림)의 경계선이 불분명해지는 현상이 포착된다. 경전과 권위에 기반하는 전통 사회와 대조하여 성향과 상황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 구별은 더욱 난해하다.
둘째는 선행에 비례하는 상, 악행에 비례하는 벌이다. 현실의 경험을 주시하면 선인이 더 힘든 희생과 봉사를 강요받고, 악인이 더 편한 기회와 자리를 보장받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에 대한 피해의식이 고조된 ‘착한 사람만의 고민’은 다음과 같다. ‘착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
마태오 복음에만 언급되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13,24-30 참조)는 ‘비유에 대한 설명’(13,37-42 참조)이 명시하듯 ‘세상 안에 선악의 공존’을 기술한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밀 소출이 목표라면, 독보리의 일종인 가라지는 시급한 제거 대상이다. 그런데 밀밭 주인은 밀과 유사한 외형을 지닌 가라지에 대한 용인이 아니라 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토대로 이렇게 선언한다.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13,29)
이 비유는 앞의 두 물음에 적용할 수 있다. 밀에 기생하는 가라지처럼 선으로 위장한 악은 식별하기 어렵다. 악은 단독으로 활보하지 않고 선에 기대어 전파된다. 밀 수확의 최종 책임자처럼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시고’(창세 1,31 참조) 더 나아가 ‘만물을 선하게 돌보시는’(지혜 12,13 참조) 하느님은 악의 문제에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죄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마련하신다.(지혜 12,19 참조) 이런 맥락에서 상선벌악 교리는 ‘수학의 비례 정식으로 계산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로마 8,27) 하느님에 대해 안내한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차이와 선악의 공존 장소이다. 차이는 인정과 관용으로, 선악은 회개와 인내로 공존한다. 선악의 공존 장소인 교회는 거룩하면서도 죄로 타락해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양면적 교회를 ‘혼합된 몸’(corpus permixtum)으로 해명하였다. 거룩한 교회는 선을 위해 악을 활용하는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교회이며, 타락한 교회는 선을 피하여 악으로 기우는 신앙인의 교회이다. 죄 많은 교회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청원한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악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인간에게 현명한 방안을 소개한다. “내버려두어라.”(마태 13,30) 이는 악에 대한 방관과 묵인이 아니라 예민과 집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자세다. 분노와 미움의 감정을 내버려두지 않기에, 곧 이로부터 자신이 점령당하고 있기에 갈등과 불화의 골이 더욱 깊어진다. ‘내버려둠’은 정화 기간의 확보이며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확신이다. 의인이 받는 고통에 대한 절박한 탄원 중에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화려하게 입히시는 하느님’(마태 6,30 참조)을 체험한 욥은 ‘내버려둠’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밀 대신 엉겅퀴가 나오고 보리 대신 잡초가 자라도 괜찮네.”(욥 3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