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먼저 목차를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목차만 가지고도 너끈히 인생과 죽음에 대한 담론을 펼칠 수 있을 만큼 각각의 소제목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은 소제목은 이런 것들이다. ‘죽음이라는 임무’ ‘위대한 인물보다는 무명의 대중에게서 얻는다’ ‘임종의 시간’ 등. 23개의 소제목 아래로 각각 두 편씩 총 47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각 글의 제목 또한 매우 흥미롭다. 읽고 싶어지는 제목들이랄까.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쓴 작가 소노 아야코(1931~2025)는 일본인이고 가톨릭 신자다. 세례명이 마리아 엘리사벳이다. 일본 작가 중 가톨릭 신자를 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한국보다 먼저 노인이 많아진 일본은 노년에 대한 철학과 담론을 다룬 책이 매우 많은데 종교에 관한 책은 보기 힘들다. 개신교 신자도 가톨릭 신자도 매우 적어서인 듯하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글 속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정체성을 밝히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나는 청년기에 이해인 수녀의 시 그리고 박완서·최인호 작가의 수필과 소설을 탐닉했다. 그리고 그 글을 통해 가톨릭에 익숙해졌다. 그들의 글 속에 가톨릭적 정서가 녹아있었기에 기실 나는 신학과 문학을 독서를 통해 익혔다.
소노 아야코의 글도 같은 흐름이다. 작가는 책 전반에 걸쳐 본인의 종교인 가톨릭을 자연스럽게 말한다. 어느덧 노년이 된 작가에게서 가톨릭 신자로서의 노년도 보였다. 미션 스쿨에 다녔던 10대의 작가, 아프리카로 수녀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나갔던 청년기의 작가,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는 노년기의 작가.
그저 수필을 읽던 나는 무방비 상태로 가톨릭 신자의 일생을 엿보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와 닿은 것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였고 다시 보니 그것이 바로 책 제목이었다. “어떤 식으로 저항하든 반드시 상대가 이기는 것이 죽음이다”, “사람이 태어나 죽어야 한다면 나도 죽는 게 당연하다”, ”죽음의 기능까지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말한다. 기정사실인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일단 죽음을 받아들여야 그에 대한 태도를 철학할 수 있으니 이치에 맞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눌러놓는 것은 우리의 죽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홍성남 신부님의 영성 심리 강의를 자주 찾아 듣는다. 출퇴근 길 운전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30분 또는 1시간이 훌쩍 넘는 강의도 종종 듣는데, 영상은 보지 못하고 소리로만 듣는 장점이 있다. 메시지에 더 깊이 집중할 수 있다. 자주 찾아 들어서인지,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게 홍성남 신부님의 각종 영상을 리스트업 해준다. 최근 영상도 많지만 3년, 5년 전 영상도 있고 쇼츠도 있다.(이제 신부님이 가로로도 나오고 세로로도 나온다)
역시나 알고리즘이 찾아준 영상 중 하나를 클릭한 어느 날이었다. 신부님이 그런 말을 하셨다. 내면의 아이는 언젠가 나온다고. 우리는 바삐 살다 보니 과거의 상처를 종종 잊고 산다고. 하지만 그것은 진짜 잊은 것이 아니라 억눌러 놓은 것일 뿐이라고. 그 아이는 그대로 있다가 언젠가 밖으로 나올 테고, 그러니 보살펴줘야 한다고. 그래야 정말 치유되는 것이라고. 내면의 아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눌러놓고 외면하는 것은 우리의 좋은 삶에도, 좋은 죽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면과 무시는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과거를 놓지 못하고 과거를 곱씹으며 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은 과거나 감정을 외면한 채 사는 것도 대안은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지난 과거는 잊고 현재와 미래를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인간의 모습이라 믿었다. 지금 살기도 바쁜데 과거를 자꾸 되새겨 뭐 할 것인가. 인간은 매우 복합적이고 다층적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과거에 생긴 어떤 상처 하나에 인생 전체의 책임을 물을 일도 아니다. 내 인생관은 오랫동안 그랬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지 않은 어떤 것들은 그 상태로 지속되지 않고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인생이란 쉽지 않다. 마음에 걸리는 어떤 인생사가 있다면, 그것은 오늘 이후의 인생을 위해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의 언젠가 탈을 일으키지 않는다.
소노 아야코 작가는 작품과 별개로 사회적 인식에 대한 단정적이고 강한 발언과 행동들로 자주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작가가 말년에 썼고 사후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은 가톨릭적 세계관을 가진 어느 평신도의 이야기다. 작가가 ‘노년’, ‘나이듦’ 등을 주제로 쓴 책들은 현재도 스테디셀러다. 작가가 어떤 태도로 죽음이라는 미션을 향해 나아갔을지 그 부분에 집중해서 읽어보자. 각각의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이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