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원경도는 박해 중에도 주님 부활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청년 그리스도인이다. 원경도 복자화.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경기도 여주에서 이곳 출신 교우 5명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복자 원경도(요한)·최창주(마르첼리노)·이중배(마르티노)와 하느님의 종 정종호·임희영이다. 20대 후반의 원경도를 제외한 네 명의 순교자는 모두 50대였다.
이틀 뒤 4월 27일에는 양근에서 여주 사람 윤유일(바오로)의 형 윤유오(야고보)와 유한숙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들 모두는 경기 감영에서 함께 배교를 강요받고, 매 맞고 갇혀 있다가 경기 감사 이익운의 상소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들 순교자와 함께 고초를 겪은 장지의는 낙안으로, 조운형은 현풍으로 유배됐다.
무릉도원 꿈꾸던 선비, 그리스도인으로
이번 호에 소개할 청년 주역은 여주 순교자 원경도(요한, 1774?~1801) 복자다. 원경도는 경기도 여주 양반 출신으로 같은 날 함께 순교한 최창주의 둘째 사위다. ‘원사신’으로도 불린 그는 23세 때인 1797년 사촌 이중배와 함께 자신보다 2살 아래인 김건순(요사팟)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아우 원경신을 비롯한 가족 모두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외종 김치석과 처사촌 최재두 등에게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다.
김건순은 1799년 6월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황사영(알렉시오)과 함께 다음 세대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갈 평신도 지도자로 양성되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 주전파로 유명한 김상헌(1570~1652)의 후손인 김건순은 특히 문장이 뛰어나고 학식이 높아 주문모 신부로부터 정약종을 도와 가톨릭교회 교리서인 「성교전서」를 편찬하는 일을 도왔다.
김건순은 그리스도교를 알기 전 그의 형 김백순,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함께 도교와 정감록에 깊이 빠져 있었다. 원경도, 이중배, 이희영(루카), 이희영의 조카 이현(안토니오), 정종호 등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기 전 김건순에게 노장 사상과 둔갑술, 신선술 등을 배우고 천지개벽 후 무릉도원인 새 세상을 희망했다. 이들 모두는 김건순이 가톨릭으로 입교한 후 그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다.
1800년 4월 13일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원경도와 이중배 등 여주 교우 6명은 정종호의 집에서 부활 첨례를 했다. 또 주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 개를 잡고 술을 장만해 길가에서 잔치를 벌이고 큰소리로 알렐루야를 외치고, 부활 삼종 기도를 합송하며 성가를 불렀다. 하루 종일 주님 부활의 기쁨을 대놓고 만끽하자 주민들이 여주 관아에 신고했다. 신고를 접한 여주 목사 김희조는 이들 모두를 잡아들이게 하고 여주와 양근 일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는 검거령을 내렸다.
배교 앞 흔들리던 마음, 사촌 도움에 다잡아
관아로 끌려오자마자 여주 목사는 원경도와 함께 잡혀 온 교우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주리를 트는 등 혹독한 형벌을 가한 후 배교할 것과 자신들에게 가톨릭 교리를 가르친 이와 교우들을 밀고하라고 강요했다.
원경도는 여주 목사에게 “밀고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돼 있으며 우리가 죽을지언정 그 누구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하느님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항변했다.
원경도가 배교하지 않고 굳건히 신앙을 증거하자 목사 김희조는 그의 장인 최창주를 잡아들여 함께 옥에 가뒀다. 이후에도 원경도와 교우들은 6개월 이상이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한 달에 두 차례씩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특히 원경도는 온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심한 매질을 당해 상처투성이였으나 다음 날이면 말끔하게 아물었다.
한 번은 늙은 여종이 옥으로 달려와 노모와 부인이 슬퍼하는 사정을 전하면서 원경도의 마음을 심하게 흔들었다. 원경도는 배교를 생각할 만큼 마음이 약해졌지만, 사촌 이중배의 도움으로 심기를 다잡을 수 있었다.
원경도의 상처를 치료해준 이중배는 “우리는 같은 날 붙들려 왔으니,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같은 날 죽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라며 원경도를 비롯해 함께 옥살이하던 교우들을 격려했다.
가족들과 한날한시에 순교
원경도와 교우들은 1800년 10월 경기 감영으로 이송돼 더욱 혹독한 옥살이를 했다. 경기 감사 이익운은 임금에게 “여러 죄수 중 더욱 못된 원경도·정종호·최창주·조운형·윤유오·장지의 등을 극률로 처단해 줄 것”을 상소했다.
순조를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는 그들 모두를 고향으로 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경기 감사는 원경도·최창주·이중배·정종호·임희영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 이들을 참형지인 여주로 이송했다.
경기 감사가 원경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교회의 지시대로 형에게 제사를 폐지하도록 권하였으니, 이는 인간의 도리를 모두 끊어버린 행위”라고 적혀 있었다. 사형 판결문이 읽히자 원경도는 그 자리에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으리라”고 신앙 고백을 했다.
원경도는 장인과 사촌을 비롯한 교우 네 명과 함께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옥거리라고도 불리는 여주 비각거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27세(혹은 28세)였다.
복자 원경도는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대에 주님 부활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하느님이 다스리는 평등 사회를 희망한 청년 그리스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