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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밥상] 여름 땅에서 캐낸 감자, 겨울 이겨낼 천연 비타민

<31>감자보리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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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깨 모종을 심어야 하는데, 밭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시기가 늦어졌다. 하는 수 없이 감자를 캐낸 자리부터 손을 봐야 했다. 퇴비를 뿌리고, 높이 쌓아올렸던 감자 둑을 낮춰 넓게 펼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들깨는 감자처럼 두둑을 쌓을 필요가 없어 뿌리가 편히 자리 잡도록 흙을 넉넉하게 펼쳐주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흙을 고르던 중이었다. 진작 캤다고 생각했던 감자들이 흙 속에서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여름 내내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도, 겉면만 살짝 포슬포슬하게 말라있을 뿐 속은 멀쩡했다. 감자는 하지가 지나기 전 캐야 한다고 한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서마저 지나가는 이 무더운 계절에, 땅속 감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감자를 캐서 밭 한쪽에 두고 생각했다. 땅속이라는 곳은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가장 믿음직한 저장고였다는 것을.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움집 곁에 저장 구덩이를 파 도토리와 곡물을 묻었고, 삼국시대 고구려에는 집집이 부경이라는 작은 창고를 두어 곡식을 갈무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겨울 채소가 귀했던 시절에는 김치를 독에 담아 땅에 묻는 지혜도 오래도록 이어져 왔다. 땅속은 겨울에도 영상의 온도를 유지해 김치가 얼지 않게 해주고, 유산균이 천천히 익어가며 아삭한 맛을 오래 붙잡아 두었다. 지금의 김치냉장고도 결국 이 원리를 적용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사람만 땅을 활용한 것이 아니다. 다람쥐와 어치도 겨울을 나기 위해 먹이를 여러 곳에 나누어 땅속에 묻어둔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땅 속에 묻어두고 이듬해 봄이면 미처 찾아 먹지 못한 도토리가 다시 상수리나무가 된다. 그렇게 숲은 풍요로워졌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땅에게 무언가를 맡기고, 다시 그것을 꺼내 쓰며 계절을 살아내고 있다.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갔다. 겨울이면 아빠는 땅이 꽁꽁 얼기 전에 삽을 들고 마당 한편을 파기 시작하셨다. 그 속에 커다란 항아리를 묻고 뚜껑을 단단히 덮어두셨다. 김장이 시작되면 완성된 김치를 함지박 가득 담아 마당으로 나갔고, 엄마가 그 깊은 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허리를 깊이 숙여 김장김치를 차곡차곡 채워 넣으셨다. 뚜껑이 닫힌 김장독은 겨울 중에서도 가장 추운 소한 무렵이 되어서야 다시 열렸고, 그 속에서 폭 익은 배추김치가 꺼내졌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추억의 맛이다. 나도 지금껏 김장을 담그고 있지만, 우리 아이들은 땅속에 묻어둔 김장독에서 갓 꺼낸 김치의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땅속에 보관되었던 것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먹거리였고, 동시에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 되었다.

밭에서 캐낸 홍감자들을 통에 담아 집으로 가져오며, 오랜만에 감자밥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집에는 여름 곡식인 보리도 있었다.

보릿고개를 지나던 시절, 벼를 수확하기 전까지 보리는 서민들의 가장 든든한 끼니였다. 지금이야 추억의 별미로 찾는 음식이 되었지만, 늦봄과 초여름의 햇살을 머금고 영근 보리에 갓 캔 감자를 툭툭 썰어 넣은 감자 보리밥 한 그릇은 단순한 제철 음식을 넘어 다가올 겨울을 잘 나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추운 겨울 땅속에서 내공을 다지며 자란 보리와 봄의 온기를 받아 영양을 채운 감자는 서로 완벽한 짝이 된다.

옛 어른들은 ‘여름내 감자를 부지런히 먹어두면 그해 겨울 감기 한 번 안 걸린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저 계절 음식을 많이 먹이려는 덕담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속에는 놀라운 과학이 숨어 있었다. 감자는 사과보다 몇 배나 많은 비타민 C를 함유하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감자의 비타민 C는 전분으로 둘러싸여 있어 불에 익혀도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여름 햇살을 머금고 땅속에서 익은 감자 한 알이 그대로 ‘천연 비타민 C 영양제’였던 셈이다.

여기에 보리의 ‘베타클루칸’과 감자의 ‘난소화성 전분’이 더해지면 장 속 유익균을 살찌우는 훌륭한 양분이 된다. 우리 몸 면역세포의 70 이상이 장에 모여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여름날의 감자 보리밥 한 그릇은 곧 다가올 겨울의 독감과 바이러스를 이겨낼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 최고의 짝꿍이다.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구수한 보리알과 포슬포슬 부서지는 감자의 소박한 조화. 땅이 내어준 이 따뜻한 한 그릇을 비워내며, 나는 오늘의 허기뿐만 아니라 다가올 추운 겨울마저 건강하게 건너갈 힘을 가만히 채워 넣는다. 여름의 한가운데서 겨울의 추위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한 그릇 밥이다.



레시피


재료
홍감자 4개, 두백감자 2개, 보리쌀 1컵, 현미 쌀 1컵, 물 2컵 반, 소금 1작은술

사전 준비
1. 감자는 깨끗이 씻는다.
2. 현미쌀, 보리쌀은 불려둔다.


조리순서
1. 감자는 한 입 크기로 썬다.
2. 불린 쌀을 넣고 준비한 분량의 물과 소금을 넣은 뒤 취사 버튼을 누른다.
3. 밥이 다 되면 잘 섞어서 공기에 담는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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