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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복음] 예수님의 침묵과 거절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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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드 트루아 작 ‘그리스도와 가나안 여인’, 1743년.


침묵은 대화 파트너 없는 독백, 자기 밖의 소리에 대한 경청, 무상무념의 상태 등 다양한 양상을 가진다. 침묵으로 양극단의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적막이 감돌아 불편함을 일으키는 침묵, 잠잠한 고요함 속에 친밀감을 형성하는 침묵이 있다. 굴욕과 수치로 인한 유구무언의 침묵과 달리, 언어를 대체하는 침묵은 인공지능(AI)이 할 수 없는 ‘대화와 소통의 도구’다.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시간을 벌게’ 하는 침묵은 이해와 포용의 씨앗이 뿌리내리는 시간을 확보한다.

반대 의사를 개진하는 침묵과 대조하여, 언어를 대체하는 침묵은 역설적으로 전적인 긍정을 시사한다. 열정적 호응과 같이, 냉소적 침묵은 ‘적극적 후원을 보장하는 동의’일 수 있다. 성과 도출을 위한 관여와 개입보다 실무자의 안정적 배경으로 작용하는 침묵은 훌륭한 리더십의 유형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잠언 11,12)

여자의 출신에 관한 언급에 인색한 복음서는 팔레스타인 전역을 포괄하는 지명인 “가나안”(마태 15,22) 출신의 부인과 관련한 사건을 보도한다. 구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탈출 3,8)으로 소개된 가나안은 모세가 주도한 이집트 탈출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 약속의 실현 장소지만, 원주민들에게 이스라엘 역사의 흥망이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점령지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과 가나안 원주민 사이에 적지 않은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 그런데 역사와 문화가 조성하는 대립과 혐오의 요인이 존재하더라도 ‘부모의 자녀 사랑’은 민족과 시공을 초월하는 현안 중 하나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딸을 둔 가나안 부인에게 순차적으로 두 가지 태도를 보이신다. 첫 번째는 침묵으로 일관한 무대응이다.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두 번째는 배타주의에 입각한 거절이다. ‘가나안 원주민을 강아지로 빗댄 발언’(마태 15,26 참조)은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이스라엘의 강한 민족주의에 대한 통찰을 요청한다. 이를 수긍하며 “그렇습니다.”(마태 15,27)라고 응답한 가나안 부인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라자로가 먹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루카 16,21)과 같은 부스러기조차 귀한 빵으로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을 고백하였다. ‘예수님의 침묵’은 가나안 부인의 간곡함을 촉진했고, ‘예수님의 거절’은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을 일깨웠다. 곧 예수님의 침묵과 거절은 역설적으로 구마 기적의 토대가 된 ‘가나안 부인의 큰 믿음’(마태 15,28 참조)을 확립하게 했다.

‘말씀을 통하여 창조’(창세 1,3 참조)하신 하느님은 구원과 심판에 대해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히브 1,1 참조)하셨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요한 1,14)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하느님의 침묵은 말씀하는(구원하는) 하느님의 부재(不在)로 여겨진다. “당신께서 제 앞에서 침묵하시어 제가 구렁으로 내려가는 이들처럼 되지 않게 하소서.”(시편 28,1)

그러나 “이방인들의 사도”(로마 11,13)로 자칭한 바오로가 설교한 바와 같이 ‘침묵으로도 말씀하는 하느님’, ‘부정으로도 강하게 긍정하는 하느님’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사 56,7)을 마련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로마 11,32) 구원 계획을 실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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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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