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심아기는 혼인을 인륜지대사로 여기는 조선의 유교 사회에서 하느님을 위해 동정을 지키며 신앙을 증거한 18살 청년 순교자다. 심아기 바르바라 복자화.
유교 경전 「예기」(禮記)는 “여자는 어려서 아버지를, 혼인해 출가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식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를 여자가 평생 지켜야 할 세 도리라 해 ‘삼종지의’(三從之義)라 했다.
조선 사회에서 혼인은 가정을 이루고 후손을 낳고 제사를 이어가는 중대한 의례였다. 특히 양반 계층의 혼인은 이러한 의미를 뛰어넘어 두 가문의 사회적 관계뿐 아니라 학맥과 정치 인맥을 연결하는 중대한 일이었다.
조선 사회가 혼례를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며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느냐면 양반이 딸의 나이 30이 넘도록 출가시키지 않으면 그 아버지가 중한 벌을 받았다. 또 양반이 가난해 딸을 시집 보내지 못하면 나라에서 그 결혼 비용을 대줬다. 나아가 혼례를 치르지 못하고 죽으면 같은 처지의 적당한 망자를 물색해 그 영혼들을 부부로 맺어주는 ‘영혼 결혼식’까지 치렀다. 이처럼 조선 사회는 죽은 사람조차도 혼례를 치러야 할 만큼 혼인은 반드시 해야 하는 유교 사회였다.
유교를 기반으로 한 조선 사회에서 삼종지의의 굴레를 깬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동정녀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동정녀들은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체포된 여느 그리스도인들보다 더욱 잔혹한 형벌을 받았다. 그들은 마치 수난당하실 때 주님처럼 옷이 전부 벗겨진 채 맨몸으로 매달려져 심하게 매질을 당하고 갖은 조롱을 들었다. 잔혹한 포졸들은 이런 고문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동정녀들을 알몸으로 남자 죄인들의 옥에 던져 넣기도 했다. 또 몇몇 관장은 포졸들이 여교우들을 성폭행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기 여교우들, 특히 동정녀들은 법의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갖은 능욕을 당해야만 했다.
초기 동정녀 공동체 구성원으로 참여
이번 호의 주인공은 복자 심아기(바르바라, 1783~1801) 동정녀다. 초기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 여교우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기 위해 정결한 삶을 선택한 동정녀들이 적지 않았다. 정광수(바르나바) 여동생 정순매(바르바라), 윤운혜(루치아) 언니 윤점혜(아가타), 강완숙(골룸바) 딸 홍순희(루치아), 궁녀 문영인(비비안나), 이합규 누이 이득임, 조섭(예로니모) 누이 조도애(아나타시아), 강완숙의 여종 소명·복임·정임 그리고 김달님, 이어린아기의 딸 김경애, 박성염, 심낙훈의 동생 심아기(바르바라) 등이 강완숙의 집에서 동정녀 공동체를 꾸려 생활했다. 이처럼 심아기는 초기 동정녀 공동체의 첫 번째 구성원이었다.
심아기는 경기도 광주 태생으로 오빠 심낙훈에게서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후 그리스도인으로서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살았다. 특히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해 하느님께 자신의 동정을 봉헌하기로 하고 집 안에서만 조용히 머물면서 기도에 몰입했다.
‘요산’이라고도 불린 오빠 심낙훈은 복자 윤유일(바오로)의 숙부 윤현과 사돈 간이었다. 윤현의 셋째 딸이 심낙훈의 며느리이다. 심낙훈은 한양으로 이주해와 사돈인 윤현의 안국동 집에서 살았다. 윤현은 명도회원으로 자신의 집에서 초기 교우들을 지도했다.
심낙훈이 한양으로 거처를 옮긴 이유는 친분이 깊던 여주 출신 교우들이 조직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서울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심낙훈이 자주 어울렸던 교우들은 윤현과 정광수, 조섭,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최창현(요한), 황사영(알렉시오), 이희영(루카), 이희영의 조카 이현(안토니오) 등이었다. 앞글에서 설명했듯이 강완숙의 집에 꾸려진 동정녀 공동체의 첫 구성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심낙훈과 교분이 깊던 교우들의 누이들이다. 심낙훈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됐으나 배교하고 전라도 무안으로 유배됐다.
숱하게 매 맞고 18세에 순교
배교한 오빠 심낙훈과 달리 동정녀 심아기는 순교의 길을 걸었다. 심아기를 비롯한 초기 조선 교회 동정녀들의 삶은 사도 시대 여교우들의 활동과 흡사했다. 우선 그들은 여성들을 교육하고 돌보았다. 그리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고 자선을 했다. 또 교회 집회 장소로 자신의 집을 기꺼이 제공했고, 선교 활동에도 협력했다. 더불어 교회 지도자로서 공동체를 위한 봉사에 헌신적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심아기는 주문모 신부와 여회장 강완숙의 지도 아래 동정녀 공동체의 책임자로 임명된 복자 윤점혜(아가타)의 지도로 교회 가르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극기와 성경 읽기, 묵상을 즐겼다.
그는 신유박해 때 체포돼 포도청으로 끌려가 모진 형벌을 받았다. 딸의 비참한 처지에 슬퍼하는 어머니에게 심아기는 “저는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기꺼이 어머니도 저의 길을 따르십시오”라고 위로했다.
그는 20일 동안 숱하게 매 맞으며 배교를 강요받았다. 심아기는 1801년 4월 초 18세 나이로 ‘순교’와 ‘동정’이라는 두 영광스러운 화관을 차지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는 심아기가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하지만 「사학징의」의 심낙훈 진술에는 “동생 심아기가 포도청에서 매 맞아 순교했다”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