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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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두 신부의 생활속의 복음] 고통의 신비

연중 제22주일 마태 16,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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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비에릭스 2세 작 ‘예수님의 수난 예고’, 1593년.



스승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예고’(마태 16,21 참조)는 제자들의 동요를 촉발하기에 충분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요청’(마태 16,24 참조)은 ‘고통과 불행, 무고통과 행복’의 등치 관계에 대한 통상적 전망을 일축한다. 인생의 디딤돌을 찾다가 “걸림돌”(마태 16,23)이라고 질책받는 제자들은 스승을 따르기에 누릴 행복과 평화를 갈망하다가 스승을 따르기에 감당해야 할 불행과 수고를 인계받은 처지에 놓였다.

고통의 근본 원인 중 하나인 불평등은 수용 정도에 따라 두 범주로 분류된다. 하나는 순수 개인의 능력에 따른 재산·직업·권력의 불평등으로, ‘묵인하는(관대한) 불평등’이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는 이 불평등이 유발하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수명·건강·환경과 연관된 인생 자체의 불평등으로, ‘이해 불가한 불평등’이다. 예로, 선천적 장애·불의의 사고·장기성 질환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 이와 이를 감내하는 가족들의 불편, 특정 시대를 함께 살아가기에 풀린 세대와 대조되는 꼬인 세대의 비애, 선택 불가한 인간관계로 인해 감정적·정서적 시련을 겪는 이의 불행, 재능·노력에 비해 넉넉히 대우받는 이와 상반된 현실을 직면하는 이의 회복 불가한 좌절이 있다.

고통의 유형과 중량이 각기 다르더라도, 한 생애 고통의 총합은 모두에게 균등할까? 고통에 관한 물음이 무신론으로 귀결된다는 위험을 간파한 교회는 선(善)하신 하느님의 ‘전능’과 인생 자체의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의 상관성을 ‘죄에 대한 벌’(에제 18,4 참조), ‘선을 위한 훈육’(애가 3,40 참조), ‘역경을 통한 단련’(시편 66,10 참조)을 소재로 규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성자 예수님이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라는 진리 외에 수긍할 만한 해답이 제시될 수 없다. 전통적으로 ‘우리를 대신하여’로 이해했던 ‘저희를 위하여’란 문구는 오늘날 ‘우리 옆에서, 우리와 함께’로 해석된다. 곧 구원자 예수님은 고통 문제의 ‘해결자’가 아닌 인간이 겪는 고통의 ‘동지, 동반자’다.

고통 중에 하느님을 부정했던 예레미야는 극단적 ‘회피와 수용’의 양가적 태도를 보인다.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 직전에 양가적 태도를 밝힌다.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이는 ‘그 자체로 악’인 고통이 합당한 예배를 위한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옆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라는 약속의 실현을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 고통 물음에 대한 최선의 해답이지 않을까? 고통이 신앙 안에서 ‘사람의 일(계산)보다 하느님의 일(섭리)을 생각하도록’(마태 16,23 참조) 인도하고 있다면, 그 고통은 ‘신비’라고 불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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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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