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이경도(가롤로)는 교회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신체 장애를 달라고 기도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척추후만증을 얻어 장애인으로 살면서 가족과 식솔, 친인척과 교우들에게 참 신앙인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한 순교자다. 이경도 복자화.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첫 복음화가 이뤄지는 성스러운 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이 이어지고 주님을 향한 성덕의 자양분을 흡수하는 거룩한 삶 터이다. 이번 호에는 복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성장해 주님의 증거자가 된 청년 순교자를 소개한다. 바로 복자 이경도(가롤로, 1780~1802)이다.
이경도는 조선 태종 이방원과 효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장자 경녕군의 15대 직계 장손이며, 예수회 중국 선교사 마태오 리치 신부가 쓴 「천주실의」를 처음 국내로 가져온 지봉 이수광의 9대손이다. 또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외손으로 이승훈(베드로)과도 친척이다. 이경도는 아버지 이윤하(마태오)와 어머니 권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순이(루갈다)와 이경언(바오로)이 그의 동생이다.
성호 이익의 학풍을 잇는 당대 유명 학자였던 아버지 이윤하는 초기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785년 봄 한양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벌어진 ‘을사 추조 적발 사건’ 당시 권일신, 이기성 등과 함께 형조로 가서 성상을 비롯한 압수 물품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윤하는 「눌암기략」을 쓴 이재기를 비롯한 동료들로부터 “서학을 멀리하라”는 충고를 받을 때마다 “내 마음으로 그것이 그른 줄을 모르겠는데 입만 가지고 배척한다면 마음이 부끄럽지 않겠는가”라며 결코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했다. 이윤하는 1793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했다.
어머니 권씨는 권철신(암브로시오)·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여동생이다. 여동생 이순이처럼 동정부부로 살았던 권천례(데레사)·권상문(세바스티아노)이 그의 이종 사촌이다. 더불어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복자) 집안과 사돈 간이다. 이경도 부모를 제외한 이들 모두는 순교자로 복자이거나 하느님의 종이다.
교회 가르침 따르고자 장애 청하며 기도
이경도는 한역서학서 중 가톨릭 서적들을 한글로 옮겨 이존창에게 제공한 오석충의 딸과 혼인했다. 그의 부인은 ‘매동댁’(梅洞宅)으로 알려져 있다. 이경도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신심 깊은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온순하고 너그러웠고 학문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는 어릴 때 척추후만증을 앓아 등이 휘어진 신체 장애가 있었다.
하지만 이 장애를 기이한 현상으로 보고하는 기록이 있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가 쓴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이다. 아버지 이윤하가 선종하자 장손인 이경도는 가문으로부터 선친 상장례와 제사에 관해 수없는 강요를 받아야만 했다. 당시 제사와 신주를 금한 교회 가르침을 따르려던 이경도는 이를 슬기롭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자신에게 장애를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등을 구부린 채 힘겹게 걷는 등 가짜 병자 행세를 했다. 그런데 실제로 장애가 왔고 그가 순교할 때까지 불구의 몸이 됐다고 한다.
이경도는 되도록 외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한림동 자신의 집에서 은거하면서 가족이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끄는 데 정성을 다했다. 더불어 그는 최필공(토마스), 홍재영(프로타시오) 등과 함께 가톨릭 교리를 공부하고, 초기 신앙 공동체 교우들을 지도했다. 이경도는 또 1797년 어머니 권씨와 상의해 여동생 이순이를 전주에 살던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요한)과 동정 부부로 언약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했다.
불편한 몸으로 형벌 견뎌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이경도는 체포돼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는 신체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사영(알렉시오)의 은신처를 캐려는 포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이경도는 11개월간 옥살이를 하다 1802년 1월 28일(음력 1801년 12월 25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자 곧 죽음을 예감한 그는 어머니 권씨에게 다음의 편지를 남겼다.
“내 죄는 한없이 큽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 또한 한없이 크십니다. 만일 주님께서 당신의 너그러운 손으로 저를 끌어당겨 주시려고 하신다면 저는 만 번이라도 죽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애석해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제 근심 걱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특별한 은총을 입어 제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크나큰 복입니다. 오늘에 이르러 하느님께서 제 바람대로 저를 도우시니, 이것이야말로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 세상에 있을 때 자식 된 도리를 다 채울 줄을 몰랐고, 어머니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 저는 이것이 가슴 아프고 회한이 될 뿐입니다. 머지않아 천국에서 영원히 다시 뵙기를 고대합니다.”
이경도는 자녀들과 식솔들에게 다음의 유훈을 남겼다. “정중과 희야, 하느님 가르침대로 어머니께 효도하고 순명하여라. 사소한 욕정을 버리고 분수에 맞는 일을 행하고 주님 마음에 들도록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모두 한 명도 빠짐없이 천국에서 만나자.”
이경도는 사형 판결 다음날인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김계완(시몬), 손경윤(제르바시오)과 함께 한양 서소문 밖(또는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황사영은 배론 토굴에서 이경도를 그리워하며 ‘과회(寡悔)가 죽는 꿈을 꾸고’라는 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