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어릴 때 항상 퇴근길에 엄마 집에 들렀다. 딸의 출산으로 조부모가 된 엄마와 아빠는 매일 손주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저녁을 먹이고 함께 보내주었다. 아무리 빨리 퇴근을 해도 직장이 있는 서울 강남에서 경기도 집까지 오면 8시가 훌쩍 넘었다. 그 시간쯤 되면 엄마는 아이를 보느라 지쳐계셨고 나는 선 채로 아이를 받아 서둘러 데리고 나왔다. 엄마가 저녁을 먹었느냐 물으면 먹었다고 대답했다.
할머니가 한동안 엄마 집에 와 계신 적이 있다. 그 시절 엄마 집에는 4대가 함께 산 셈이다. 그날도 나는 엄마의 “밥은?”이라는 물음에 먹었다고 답을 하며 신발도 벗지 않고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서던 중이었다. 그때 할머니가 나를 붙잡고 물었다. “아가, 참말 저녁을 먹었냐?” 1초쯤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고 웃으며 대답했다. “네, 할머니.”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이미 밥을 먹은 것과 같아졌다. 살면서 듣기 좋은 말, 따뜻한 말만 들으면서 산 것은 절대 아닌데,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그런 말이다. 따뜻하고 뭉클한 말, 그런 말들의 합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그림책 「옥춘당」의 화자는 손녀다. 표지에는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모자를 씌워주며 가만가만 만지는 모습과 할머니가 매달리듯 안겨 할아버지의 얼굴을 가만가만 만지는 모습이 있다. 책을 펼치니 첫 장에 “사랑을 믿는 당신에게”라고 쓰여 있다.
「옥춘당」은 손녀의 인생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들의 합이다. 볕이 따갑다며 할머니에게 모자를 씌워주는 할아버지, 계단을 오를 때 조심조심 할머니를 조심시키며 함께 걷는 부부의 뒷모습, 제삿날이면 “눈 감아 봐”라며 할머니 입에 살며시 옥춘당을 넣어주는 할아버지, 봄밤이면 함께 꽃나무를 올려다보면서 “순임아, 봄밤이 좋네”라고 말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다정했던 할아버지를 잃은 후 말을 잃고 점차 기억도 잃어가는 할머니, 그렇게 20년을 혼자 살고 그중 10년은 요양병원에서 보내다가 할아버지 곁으로 가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
내 할머니가 느릿느릿 거실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작아지고 색이 혼탁해진 눈동자로 나를 주시하며 물었던 말, “아가, 참말 저녁을 먹었냐?” 그 장면이 지금도 종종 떠오른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과 손길로 어린 손주와 함께 걷는 노인들을 볼 때,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할머니를 생각한다. 나에게도 할머니가 있었는데. 추운 가을, 새벽 바람을 맞으며 빨간 홍시를 따다 주면서 할머니가 했던 말 “아가, 이거 너 묵어라.” 철컹, 창호지가 발린 여닫이문의 쇠로 된 문고리를 여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 쑥 들어오는 머릿수건을 한 할머니의 볕에 탄 얼굴과 빨간 홍시. 그런 장면들이 사는 내내 나와 함께한다.
순간은 장면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것이 나의 정서(情緖)를 만든다. 기쁨·슬픔·사랑·미움 그리고 또 여러 가지 감정. 어느 지점에서 기뻐하고 어떤 일이 있을 때 눈물을 흘리고 또 어떤 상황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할지. 그런 감정의 토대가 되는 것은 나의 기억들이다. 부모의 삶이 자식에게 본보기가 되듯이 부모가 남겨준 삶의 장면들은 자식의 정서를 완성한다.
얼마 전 한 라디오 방송에서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다루었다. 「변신」은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벌레로 변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가장이던 그는 벌레가 된 후 가족들의 짐이 되고 점점 소외되다가 결국 냉대를 받는다. 그리고 다른 가족 구성원이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가족은 사랑해서 필요한가, 필요해서 사랑하나?’라는 DJ의 물음에, 박연준 시인이 답한다. 가족은 너무 사랑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좋아한다는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이 훨씬 더 큰 범위 같다고. 알 것 같은 말이다. 가족에 대해 우리는 쉽게 말한다. ‘나는 엄마와 안 맞아’ ‘나는 동생이 싫어’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서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확실해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돌아가신 나의 어른들은 모두 장면으로 남아있다. 할머니의 그 말 “아가, 참말 저녁을 먹었냐?” 그리고 시어머니가 자주 했던 말 “니들만 잘살면 돼. 엄마는 괜찮아.”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외할머니의 다른 말과 모습들. 그것은 모두 장면으로 남아 나의 정서가 되었다.
나는 어떤 장면으로 나의 사람들에게 남게 될까. 가끔 생각한다. 이른 아침 아이를 깨우는 내 목소리, 잠이 덜 깬 눈으로 밥을 하는 내 뒷모습, 하루일과가 끝난 후 늦은 저녁을 먹는 나의 일상, 언젠가 흥분해서 평소와 다르게 험한 말을 하는 나의 찡그린 얼굴, 그런 순간들이 내 아이에게는 모두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이 든 노년기 나는 어떤 장면으로 남을 것인가. 그 생각을 하면 서늘하다. 그리고 따뜻하다. 아직은 시간이 있고 가능성이 있고 희망이 있어서다. 아이가 기억할 내가 등장하는 무수한 장면, 그 속의 나를 상상하며 만들어 볼 시간. 아직은 충분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