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을 입고 성묘 가는 행색을 꾸민 황사영이 김한빈과 함께 박해를 피해 은신처인 배론으로 가는 장면을 묘사한 탁희성 화백 작품.
“선교 자유 위해 서양의 배를 보내주십시오”
1784년 늦가을 한양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거행된 세례식으로 탄생한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는 1801년 9월 황사영 백서가 발각될 때까지 17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북경 주교에게 ‘대박청래’(大舶請來)를 요청했다. 대박청래는 서양인 성직자가 큰 배를 타고 조선에 와서 임금에게 서양의 문물을 제공하고 선교의 자유를 공식으로 허락받는 것을 뜻한다.
1790년 이승훈(베드로)·홍낙민(루카)·지황(사바)·이가환 등이 윤유일(바오로)을 북경으로 보내 구베아 주교에게 처음으로 대박청래를 요청했다. 구베아 주교는 이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성직자 파견을 약속했다. 이 일을 추진했던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오로지 성직자를 맞아들일 염원으로 서양의 큰 배를 청했다. 따라서 그들은 ‘성직자’와 ‘서양 큰 배’를 같은 개념으로 인지했다.
두 번째 대박청래 요청은 1796년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발의로 추진됐다. 1795년 6월 관원들에게 체포될 뻔한 주 신부는 서양의 큰 배를 불러들여 자신의 조선 선교 활동을 보호받기를 원했다.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낸 대박청래 청원서에는 이승훈·홍낙민·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최창현(요한)·유관검·황사영(알렉시오)이 조선 교우 대표로 서명돼 있었다. 이들은 서양의 큰 배가 와서 조선 임금에게 필요한 서양 문물을 제공하면 새로운 사회 질서가 수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성직자=서양 큰 배’라는 1차 요청 때보다 그 개념이 확대된 것이다.
구베아 주교는 청원서를 들고온 황심(토마스)에게 “서한을 교황께 전달하겠지만, 교황청이 조선 정부가 가톨릭을 금하고 있는 사실을 무릅쓰면서까지 큰 배를 파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덧붙여 구베아 주교는 “이 일에 많은 돈이 든다”고 지적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1·2차 대박청래를 북경 교회에 요청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조선 교회 지도자 대부분이 순교했다.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 산골에 숨어지내던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帛書)를 작성해 세 번째 대박청래를 제안했다. 황사영은 1·2차 대박청래를 제안했던 조선 교회 지도자들과 달리 “신앙 자유를 위해 서양의 무력을 동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박청래 개념이 성직자 영입, 서양의 선진 문물을 통한 조선의 새로운 사회 질서 구현이 아닌 ‘군사력 동원’으로 바뀐 것이다.
무력을 수반한 황사영의 대박청래 방안에 대해 교회 일각에서는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을 거스른 당시 조선 조정에 대한 불가피한 저항으로 보고, 도덕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가치 중립적 사안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명도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다 배론에 은거
이번 호의 주인공은 26년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 순교한 조선 유생이며 그리스도인이었던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이다.
황사영은 인조에게 직언해 여러 차례 파직된 남인 시파 만랑 황호(1604~1656)의 7대 종손이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증조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790년 15살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정약현의 큰 딸 정명련(난주, 마리아)과 혼인했다. 혼인 후 처삼촌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정약용(요한 사도), 처고모부 이승훈에게 교리를 배워 그리스도인이 됐다.
황사영은 정조가 20살이 되면 중용하겠다며 장래를 보장해줬지만, 입신양명을 포기하고 교우들과 교류하면서 밤낮으로 교회 서적을 탐독했다. 특히 그는 명도회 회원으로 한양 아현에 있는 자신의 집을 명도회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의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조선 교회 안에서 황사영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신유박해가 일어난 직후인 1801년 3월 23일 조정에서는 그의 체포령을 내렸다.
체포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황사영은 김한빈(베드로)과 함께 제천 배론에 사는 김귀동의 집으로 가서 토굴에 숨어 살았다. 배론에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여러 교우의 순교 소식을 들은 그는 가로 62㎝·세로 38㎝의 흰 명주 천에 붓으로 북경 주교에게 보낼 122행 1만 3384자의 백서를 썼다. 백서에는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55명의 인물이 소개되고 있고 이들 중 39명의 순교 행적이 적혀 있다. 또 신앙의 자유를 위한 대박청래 청원도 담겨 있었다. 1801년 10월 29일(음력 9월 22일) 완성된 백서는 밀사로 활동하던 옥천희(요한)가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백서가 완성되기도 전인 10월 22일 옥천희에게 백서를 전달하기로 한 황심이 체포됐다. 황사영 백서 초안을 봤던 황심은 문초 끝에 배론 은거지를 실토했다. 황사영은 그해 11월 5일 김한빈과 함께 배론에서 체포됐고, 백서도 압수됐다.
조선 순교자 시복식 때 바티칸에 전해진 ‘백서’
백서 내용을 본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황사영은 11월 14일부터 약 한 달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대역부도(大逆不道) 죄로 사형 판결을 받은 황사영은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 한양 서소문 밖 형장에서 능지처사 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황사영 백서는 의금부에 압수됐다가 1894년 갑오경장 때 소각 폐기되기 직전 담당 관리가 빼돌려 친구 이건영에게 몰래 줬고, 천주교인이었던 이건영은 바로 뮈텔 주교에게 건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바티칸에서 거행된 조선 교회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비오 11세 교황에게 백서를 선물했다. 황사영 백서 원본은 현재 바티칸 민속박물관 서고에 소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