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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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선 작가의 노년을 읽습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노년의 유산’

38. 주지현 「미술관에서 노년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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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책은 길이 없을 때 길을 만들어주고,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찾게 도와준다. 나는 인생에서 새로운 과제를 맞닥뜨렸을 때 항상 서점으로 간다. 관련 책들을 사서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다. 그것이 고난이 왔을 때의 내 루틴이다. 이 루틴은 꽤 효과가 있어서 이제는 책을 사는 행동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마치 커피를 마시기 전부터 ‘이제 잠이 깰 거야’라는 기대가 생기는 것과 같다.

「미술관에서 노년을 만났습니다」는 내게 ‘그림 속에 무언가가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주지현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 “그림 앞에서 노년을 새롭게 질문하는 일”을 나도 하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인류가 기록한 ‘노년이라는 유산’을 보았다. 작가는 “이 책에서 명화는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그림 속 주인공의 표정과 자세, 그리고 그들을 그려낸 화가의 삶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텍스트다”라고 말했다. 그림에 담겨 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들, 그것은 그림 속 인물의 사연이자 인류에 대한 기록이었다.

노년의 여가는 큰 짐이자 숙제다. 대부분의 직장 생활자는 은퇴와 함께 어마어마한 여가 시간을 숙제처럼 받는다. 은퇴 후 어떤 것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지 부푼 마음으로 상상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가를 마치 잉여의 시간으로 여기며 자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1부 중 ‘새로운 숙제-여가 길들이기’에는 여가를 그린 다양한 그림이 나온다. 한 그림에서 여가는 노동 중 쉬는 시간이었고, 다른 그림에서 여가는 계획된 휴식이었다. 노년이 되기까지 여가를 제대로 즐기지 않았으면서 왜 갑자기 노년이 되어서 재미있는 여가를 보내려고 하는가? 대개 우리는 여가란 남는 시간에 하는 것 혹은 노동을 더 잘하기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는 시간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렇게 미뤄둔 여가는 숙제가 되고 만다. 그러니 노년이 오기 전에 여가를 일상으로 들여야 한다.

책을 넘기다 보니 물 속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진 소년을 그린 그림 ‘나르시스’가 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중요한 것은 ‘자기애’ 자체가 아니다. 시선이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라고 썼다. 작가의 뜻을 바로 눈치챘다. 시선의 고립은 관계의 고립을 부른다. 이것은 노년의 관계에 대한 말이다.

나는 노년의 여가와 노년의 관계를 한 선상에 놓고 본다. 작가의 말대로 노인이 되기까지 여가를 잘 보낼 방법을 배운 적 없는 것처럼 우리는 오래된 관계에 공을 들이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노력이 드는 것과 같이 오래된 관계도 가꾸어야 지속된다. 이를테면 가족이 그렇고 오랜 지인이 그렇다. 부모가 그렇고 자식이 그렇다. 청춘과 중년과 노년의 관계 맺기는 모두 다르다.

어느 상담가의 영상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많은 가족이 그렇게 깊게 갈등하는 이유는, 가족과 잘 지내는 방법을 어디에서도 배워 본 적이 없어서라고. 그래서 오랫동안 관계해 왔던 가족들 사이가 뒤늦게 탈을 일으키기도 하는 거라고. 물 흐르듯 흘러가도록 내버려둔 관계는 급류에 휩쓸려 버릴 위험이 크다. 내버려두어도 좋은 관계란 없다.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우리 옆에는 그게 누구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대개 가족이다.

2부의 ‘다시 효를 묻다-자식 노릇이 자라는 시간’에는 ‘효’라는 글자가 새겨진 병풍이 나온다. 그리고 이런저런 부모를 그린 그림이 나온다. 늙어가는 한 인간으로서의 부모들. 효란 오랫동안 이어져 온 부모와 자식 사이의 윤리다. 그런데 현대의 우리는 과거의 부모·자식과는 많은 점이 다르다. 작가는 “부모는 오래 살아있고, 자식은 오랫동안 자식으로 남는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종종 한탄하지만, 사실 내 부모의 늙음과 내 자식의 성장을 분 단위로 보고 있다. 과거에 비해 이 시대의 부모와 자식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지낸다. 교통·통신, 그 밖의 다른 상황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길어진 인생, 부모로서도 자식으로서도 살아야 할 날이 매우 길다. 내 외할아버지는 97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큰사위인 아빠는 79세였다. 아빠는 납골당에 모셔진 망자들의 생몰년을 유심히 보더니 “죽은 사람들의 나이가 모두 내 또래, 아니면 나보다 어리다”라고 낯선 표정으로 말했다. 병원에 가면 백발의 부모를 수발하는 자식 또한 백발인 경우가 태반이다. 부모, 자식이 노년을 함께 맞는다. 다만 더 늙고 덜 늙고의 차이다. 그러니 작가의 말처럼 효에 대한 관념도 그것의 실행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져야 하는 시대다.

사랑·시간·노동·노화·죽음·애도·돌봄·효·우정. 그림을 보고 그림을 읽어주는 글을 읽으며 많은 질문이 생기고 많은 감정이 올라왔다. 노년은 외따로 떨어진 무언가가 아니라 인류·인간의 역사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책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그림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인류가 남긴 노년이라는 유산이 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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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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