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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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은 고문에도 신앙 지키고 순교한 ‘교우촌 회장’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39) 복자 최해성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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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최해성(요한)이 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동안 욕설을 퍼붓고 매질하고 고문을 가했던 포졸들과 옥리들이 그를 뒤쫓아 가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최해성 복자화


가난한 생활 속에도 이웃 위해 나눔 실천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유럽의 교우들이 감동하거나 신앙의 표양으로 삼을 만한 조선 순교자들을 기록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복자 최해성(‘양박’이라고도 불림, 요한, 1811~1839)이다.

그의 집안은 충청도 홍주 다락골에서 살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그의 할아버지가 체포돼 유배를 가게 되면서 온 가족이 할아버지 유배소로 이주했다. 최해성은 유배지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는 최양업 신부 집안뿐 아니라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최봉한(프란치스코)과도 친척 간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하므로 모든 이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 그는 신앙생활을 합당하게 실천하기 위해 외교인들이 사는 유배지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작은 교우촌을 이룬 다음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착한 표양으로 모든 이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극도로 가난해 비참하리만큼 곤궁한 생활을 했으나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돕기 위해 가진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본분을 이행하는 데 열성을 다했고, 교우들을 격려하며 비신자들을 권면하는 데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자기 마을에 사제가 오셔서 성사의 은총을 받을 때에는 말할 수 없는 열정에 불탔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이 모든 덕행에 감동한 선교사는 그를 그 교우촌 회장으로 임명했습니다.”(최양업 신부가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56년 9월 13일 자 편지 중에서)

최해성이 가족과 함께 일구고 회장직을 수행한 교우촌은 바로 서지마을(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서지길2)이다. 그는 서지마을 교우들에게 자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행복”이라고 가르쳤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의 복자 최해성의 약전에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해성은 먼저 가족과 교우들을 제천 꽃당리에 안전하게 피신시킨 후 교회 서적을 가져오려고 다시 집으로 갔다가 체포됐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395~397쪽)에는 “1839년 음력 1월 말에 사악한 한 외교인이 서지마을 교우들을 고발했고 포졸들이 먹잇감을 포획하기 위해 마을에 도착했으나 모든 교우가 도망친 후여서 ‘양박’이라는 최(해성) 요한의 가족만 붙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원주 땅 다 줘도 하느님 배반할 수 없어”

여하튼 최해성은 쇠 도리깨로 무장한 포졸들에게 잡혔다. ‘천하장사’로 소문나있던 그를 잡기 위해 포졸들이 단단히 무장한 것이다. 포졸들은 그를 둘러싸고 쇠 도리깨를 휘두르면서 위협했지만, 최해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돼 원주 강원감영으로 끌려갔다.

강원 관찰사 홍치규가 직접 최해성을 신문했다. 홍치규가 “네가 사교를 따른다는 것이 사실이냐?”라고 물으니 최해성은 “저는 사교를 모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천주교를 믿고 따를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옆에 있던 포졸들이 쇠 도리깨로 그를 모질게 매질했다. 이어 강원 관찰사는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강요했지만, 최해성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찰사가 최해성을 옥에 가두자 포졸들이 떼로 몰려와 그에게 욕을 퍼붓고는 의식을 잃고 팔다리를 가눌 수 없을 만큼 매질을 했다.

며칠이 지나 매질로 인한 상처가 조금 아물자 강원 관찰사는 다시 최해성을 신문했다. “네가 만일 배교하면 너는 임금께 충실한 백성이 되는 것이고, 너의 재산도 모두 돌려주겠다. 하지만 배교하지 않으면 끔찍한 고문을 당할 것”이라고 윽박질렀다. 최해성은 이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게 원주를 다 준다 해도 저는 저의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했다. 이 말에 화가 치민 관찰사는 곤장 100대를 치게 했다.


몸이 누더기가 되도록 형벌

최해성은 1839년 4월 1일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에 다시 관찰사에게 끌려갔다. 홍치규는 “네가 끝내 죽기를 바라는 게구나” 하고 호통을 쳤다. 최해성은 이에 “제가 지금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목숨을 보전하려고 한다면, 제 영혼은 영원히 죽을 것이므로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임금과 의(義)를 위해 죽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배반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는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위대한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맹세한 제가 어찌 형벌을 두려워하여 이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담대히 말했다.

이렇게 최해성은 강원감영에서 21차례 신문과 18차례 형벌을 받았다. 최해성은 관찰사 앞에서도 고문을, 옥으로 돌아간 뒤에도 매질을 당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 “요한은 기쁘게 고문을 참았으며 매질 속에서 하느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더욱 커갔다”고 했다.

매질만으론 최해성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관찰사는 곤장과 주리 틀기, 족쇄를 채운 채 반나절 동안 거꾸로 매달기 등 갖은 고문을 동원했다. 형벌이 잔혹하고 모질수록 최해성의 몸은 누더기가 됐다. 온몸의 뼈가 다 드러나 내장이 보였다. 이러한 형벌 속에서도 최해성은 오직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순교의 마음을 다져나갔다.

형조는 최해성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홍치규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휘정이 1839년 9월 6일(음력 7월 29일) 참수형을 집행했다. 최해성은 28세 나이로 순교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최해성을 “가장 훌륭한 순교자 중 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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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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