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마지막 수요일은 곽지원빵공방에서 갓 구운 우리 밀 빵이 생협에 들어오는 날이다. 공방에서는 매달 우리 밀로 ‘이달의 빵’을 만들어 팔당생협 조합원들에게 선보이는데, 이번 주인공은 심재법 농부님의 단호박을 넣은 노란 ‘단호박식빵’이다.
사실 이 단호박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본래 학교 급식용으로 심었으나 가뭄 탓에 일찍 익은 것은 터지고, 늦게 익은 것은 작고 덜 여물어 납품에서 탈락했다. 농가의 어려움을 돕고자 생협 판매를 제안했지만, 만족스럽게 키워내지 못했다며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고 농부님이 전해오셨다. 단호박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던 나를 본 곽지원빵공방의 이경화 공동대표님이 선뜻 단호박으로 빵을 구워보자고 청했다. 그렇게 버려질 뻔한 단호박은 고소하고 노란 식빵으로 다시 태어났다.
지난 일요일, 이 단호박식빵으로 식구들과 브런치를 만들었다. 수업 후 남은 양배추, 애호박과 밭에서 솎아낸 고수와 당근라페, 친구가 준 사과와 버섯볶음을 올린 냉장고 털이 오픈 샌드위치였다. 다들 맛있다며 좋아했다. 단호박의 성장 과정을 되짚어보니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가뭄과 폭우 앞에서 가장 먼저 흔들리는 이는 농민이다. 자연의 변화를 농부가 온몸으로 떠안는 동안, 시장이 정한 엄격한 규격에서 벗어난 작물은 갈 곳을 잃고 한 해 농사를 흔든다.
우리 밀 역시 이러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 작물이다. 밀은 자가수분 작물로 바람이나 곤충 없이도 열매를 맺어 건조한 평원부터 추운 지역까지 지구 상에서 가장 넓게 재배되어 온 인류의 핵심 식량이다. 요즘 전 세계와 MZ세대를 사로잡은 K-디저트 약과는 누구나 손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하지만 고려 시대 약과는 왕족과 귀족들만 맛볼 수 있었던 최고급 영양식이자 국가가 금지령까지 내려야 했던 고급 디저트였다. 약과의 주성분이 밀과 꿀, 참기름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밀가루를 수입해 만들 정도로 약과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한다.
한의학에서도 밀은 소중한 식재료로 다뤄졌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밀(소맥)은 성질이 서늘하여 기운을 돋우고 위장을 튼튼하게 하며 열과 갈증을 해소한다. 특히 통밀을 끓여 먹으면 몸의 열을 내리고 식은땀을 멎게 하는 보약이 된다 했다. 다만 가루 낸 밀이 오래되면 성질이 열이 생기고 소화를 방해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을 때는 열을 풀어주고 소화를 돕는 채소와 함께 먹으라고 권했다. 지혜로운 조상들의 가르침처럼 밀은 결코 나쁜 음식이 아니라 조합에 따라 훌륭한 건강식이 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밀의 자급률은 여전히 1 내외에 머물러 있다. 한 해 1인당 밀 소비량이 38㎏에 달해 우리가 먹는 식사 중 하루 한 끼는 밀로 만든 음식을 먹을 만큼 소비는 늘었다. 우리가 소비하는 밀의 대부분은 수입 밀이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수입량은 280만 톤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반면 우리 밀 창고에는 소비되지 못한 밀이 6만 톤 넘게 쌓여가고 있다. 정부가 2030년까지 자급률 8를 목표로 한 계획을 발표했다. 이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 밥상부터 달라져야 한다.
정부는 품질 개발과 군대 및 공공급식을 통해 소비를 촉진하고, 농부들이 안심하고 농사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소비자 역시 우리 밀 소비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나마 우리 밀을 지켜온 힘은 우리농과 생협 그리고 조합원이 만들어낸 따뜻한 연대였다. 직거래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계약이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가 위험을 나누고 서로의 사정을 보살피는 일이다.
거창한 일을 하자는 게 아니다. 장을 볼 때 모양이 조금 못나도 제철 농산물을 기꺼이 집어들고, ‘이 농산물은 누가 키웠을까?’ 한 번쯤 떠올려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농민과 농업을 향한 작은 관심이 모일 때 버려질 뻔한 단호박이 맛있는 식빵이 되듯 어려움은 따뜻한 이야기로, 그 이야기는 다시 우리의 건강한 밥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정부의 정책이 제대로 잘 실현되고 있는지 관심 가지고 살피는 일도 꼭 해야겠다.
하늘이 높고 푸른 가을날, 오늘 점심에는 가까운 이들과 따뜻한 체온이 담긴 우리 밀 오픈 샌드위치 한 접시 나눠보면 어떨까?
레시피
1. 양배추·애호박 샌드위치
애호박은 감자 필러로 길고 얇게 썰어 올리브유에 볶는다. 소금과 고춧가루를 아주 조금 넣고, 마지막에 들깻가루를 넣어 마무리한다. 식빵에 양배추 채를 깔고 볶은 애호박을 듬뿍 올린다.
2. 루콜라·당근라페 샌드위치
당근은 감자 필러로 얇게 썰어 소금에 10분쯤 절인 뒤, 올리브유, 레몬즙(또는 식초), 통들깨(검정깨도 좋다)를 넣어 버무린다. 식빵에 루콜라 등 샐러드믹스 채소를 깔고 당근라페를 듬뿍 올린다.
3. 사과·버섯 샌드위치
버섯은 얇게 썰어 간장과 후추를 넣고, 수분이 날아가도록 볶아 준다. 식빵에 시나노골드 사과를 동그랗게 썰어 올리고, 버섯볶음을 듬뿍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