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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 힘쓰다 아버지와 매 맞고 숨 거둔 소년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 (40) 하느님의 종 김장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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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김장복은 배교자의 밀고로 붙잡혀 갖은 형벌에도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다 18세 나이로 옥사했다. 대구대교구 관덕정현양사업회가 제작한 하느님의 종 김흥금·김장복·안치룡 순교자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조선의 임금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마다 교회에 치명적인 상처를 준 밀고자들이 등장했다. 그 대표 인물이 한영익·조화진·김순성(김여상)이다.

한영익은 1795년 6월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조선 입국 사실을 조정에 밀고했다. 이 일로 최인길(마티아)·윤유일(바오로)·지황(사바)이 체포돼 순교했다.

조화진은 정조의 밀명을 받고 초기 조선 가톨릭교회에 잠입해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며 신앙 공동체 조직을 염탐하고 교우들을 밀고했다. 특히 그는 1797년 충청도 남부 내포 하부 지역에서 일어난 정사박해 때 활동했다. 그의 밀고로 이도기(바오로)·방 프란치스코·박취득(라우렌시오)·원시보(야고보)·정산필(베드로)·배관겸(프란치스코)·인언민(마르티노)·이보현(프란치스코) 등 8명이 체포돼 순교했다. 필공과 보부상 행세를 하며 살갑게 지냈던 자가 자신들을 밀고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교우들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자신들을 교회로 이끈 자가 조화진이라고 지목해 고발했다. 체포된 조화진은 자신이 정조의 밀명을 받은 자라고 알렸으나 아무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김여상’으로도 불린 김순성은 김대건 신부가 부제 때 ‘배반자 유다스’라고 지목한 인물이다. 1801년 2월 21일(음력 1월 9일) 김순성의 밀고로 조선 가톨릭교회 총회장 최창현(요한)이 체포됐다. 이 사건으로 정순왕후는 바로 다음날 전국의 수령에게 ‘오가작통법’을 발동, 모든 그리스도인을 잡아들여 코를 베고 그 종자를 없애라는 내용의 가톨릭 금교령을 내렸다. 바로 신유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김순성은 1839년 기해박해 때에도 활동해 그의 밀고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가 순교했다.


박해 피해 경상도로 떠나 신앙생활

이번 호에는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돼 고초를 겪다 순교한 10대 청년 김장복(1797~1815)을 소개한다. 하느님의 종 김장복은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여동생 작단(作丹)과 함께 생활했다. 그의 아버지 김흥금은 1801년 신유박해 때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온 가족이 그리스도인이 됐다. 그리고 너무 가난해 홍주에서 충청도 연풍 교우촌으로 이주해 살았다.

하지만 포졸들이 연풍 교우촌을 습격, 신자 대부분을 붙잡아 한양으로 압송했다. 다행히 체포를 면한 김흥금은 어린 장복과 작단을 데리고 경상도 진보 땅으로 몸을 숨겼다.

김장복은 이곳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교우들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특히 그는 어리고 가난하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적극 나섰다.


밀고자·포졸 습격으로 파스카 성야에 체포

그러던 중 1814년 조선 땅에 대기근이 엄습했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5~6월 보릿고개 때 경상도 지역 기근이 극심했다. 김장복의 가족이 살던 진보에서도 주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가 그 길 위에서 쓰러지거나 숨을 거두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 시기 밀고자 전지순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경상도 지역 교우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먹을 것과 돈을 구걸했다. 교우들은 자신들도 살림살이가 빠듯했지만,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잠자리까지 흔쾌히 제공했다. 전지순은 교우들에게 뽑아 먹을 만큼 다 뽑아 먹은 후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으면 그들을 밀고했다. 그리고 그는 교우들이 붙잡혀간 뒤 빈집을 털어 착복했다.

전지순은 크게 한 탕을 벌이기로 하고 포졸들과 모의해 1815년 주님 부활 대축일 밤에 청송 노래산 교우촌을 습격하기로 했다. 드디어 그 날이 왔고, 노래산에 흩어져 있던 교우들이 모여 파스카 성야를 기념할 때 전지순은 포졸들의 길잡이가 되어 교우촌을 덮쳐 그곳 신자들을 안동 관아로 압송했다. 한국천주교회사에 ‘1815년 을해박해’로 기록돼 있는 바로 그 사건이다.

김장복의 가족은 을해박해 때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 교우촌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돼 안동 관아로 끌려갔다. 그의 가족은 이곳에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다시 교우들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됐다.


고문 당할 때 주님 수난 묵상하며 기뻐해

경상 감사 이존수는 유교의 땅 경상도에서 사악한 종교를 믿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다며 진보에서 끌려온 교우 33명을 가혹하게 다스렸다. 특히 그는 김장복과 그의 여동생 작단이처럼 어린이와 10대들을 배교시키기 위해 갖은 고문을 자행했다. 김장복은 매질을 당할 때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기뻐했다. “배교하라”는 감사의 윽박지름에 그는 언제나 “죽으면 죽었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형조에서 김장복 가족에 대한 판결이 경상 감영으로 내려왔다. “아비 김흥금은 가르치고, 자식 김장복은 배워서 사악한 종교를 깊이 믿게 되었으니 다시 조사해 배교를 하면 살아날 길을 열어주고, 끝까지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라”는 지시였다.

이 지시에 따라 경상 감사 이존수는 김흥금과 김장복을 불러내어 마지막 문초를 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신앙을 증거하자 감사는 둘에게 각각 장 100대를 치게 했다.

김흥금과 김장복은 이후 매질로 인한 장독과 굶주림으로 1815년 11월 18일(또는 1816년 12월 9일)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때 김흥금이 51세, 김장복이 18세였다. 여동생 작단은 장 100대를 맞은 후 만경현으로 유배됐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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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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