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조이(바르바라)는 신유·기해·병인박해 순교자를 배출한 홍낙민(루카) 집안의 며느리로 3살 아들과 함께 전주 감영에서 옥중 순교했다. 심조이 복자화.
조선 왕조 치하 100여 년의 박해기 동안 3대에 걸쳐 순교자들을 배출한 신심 깊은 가문이 여럿 있다. 그중 복자 홍낙민(루카, 1751~1801) 집안의 순교 이력과 26살 꽃다운 나이에 3살 아들과 함께 순교한 복자 심조이(바르바라, 1813~1839)를 소개한다.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 창립 초기 충청도 내포 지방을 복음화한 인물이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다. 이존창이 예산 여사울을 중심으로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든든한 후견인 홍낙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가톨릭 신앙 공동체 초기 구성원이었던 홍낙민은 가성직제도를 시행할 때 충청도 지역 ‘신부’로 활동했다. 홍낙민은 그의 종 이존창을 면천해 평민으로 신분을 상승시켜줬고, 그를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여보내 글 공부를 시켰다. 또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게 했다. 아울러 홍낙민은 한글본 가톨릭 서적을 이존창에게 지원해 그의 선교에 힘을 보탰다.
홍낙민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도와 이존창을 후원하며 실질적인 충청도 내포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는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최창현(요한), 최필공(토마스), 이승훈(베드로)과 함께 한양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돼 순교했다.
초기 교회 이끈 아버지 따라 아들도 순교
신유박해 순교자 홍낙민의 아들 복자 홍재영(프로타시오, 1780~1840)은 기해박해 순교자이다. 홍재영은 아버지 홍낙민과 함께 신유박해 때 체포됐으나 배교하고 전라도 광주로 유배됐다. 1832년 사면령으로 유배지에서 풀려난 그는 고향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광주에 정착했다.
홍재영은 1839년 기해박해 때 또다시 체포돼 이듬해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전주 숲정이에서 최조이(바르바라), 이조이(막달레나), 오종례(야고보)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홍재영의 조카이자 홍낙민의 손자인 홍병주(베드로, 1798~1840)와 홍영주(바오로,1801~1840) 형제 또한 기해박해 때 당고개에서 순교해 성인품에 올랐다.
배교 후 죄책감으로 방황하다 회심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하느님의 종 홍봉주(토마스)가 홍재영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가 유배 생활을 하던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부모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기해박해 때 배교하고 풀려났다. 그는 광주를 떠나 선대의 고향 예산에 자리를 잡았지만, 아버지와 아내 그리고 어린 아들이 순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 살기 위해 주님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다 1853년 최양업 신부를 만나 회개하고 매스트르 신부의 신임을 얻어 중국 상해로 가서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를 입국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귀국 후 그는 한양에서 베르뇌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며 한글본 교회 서적 출간 일을 맡아 했다.
홍봉주는 1865년 흥선대원군에게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고 건의했다. 흥선대원군은 약속과 달리 1866년 병인박해를 일으켜 제일 먼저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를 잡아들였다. 홍봉주는 그해 3월 7일(음력 1월 21일) 할아버지 홍낙민이 순교했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 순교했다.
교우들 돌보다 가족과 체포
이번 호의 주인공 복자 심조이(바르바라, 1813~1839)는 홍봉주의 아내이다. 그는 인천의 그리스도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 홍봉주와 혼인해 광주에서 살았다.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수많은 교우가 그의 집에 몸을 숨겼다. 그의 시아버지 홍재영의 명성이 교우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조이는 이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면서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특히 김조이(아나스타시아)와 이봉금(아나스타시아) 모녀, 이조이(막달레나), 최조이(바르바라)를 가족처럼 대했다.
1839년 7월 24일(음력 6월 4일) 심조이는 시아버지 홍재영과 남편 홍봉주, 그리고 4명의 여교우 등과 함께 체포돼 전주 감영 옥에 갇혔다. 전라 감사 이목연은 심조이에게 배교를 강요했다. 이를 거부하자 포졸들은 그에게 매질을 비롯한 갖은 고문을 자행했다. 살점이 갈기갈기 찢어져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포졸들과 형리들의 욕설과 이와 빈대가 들끓는 더러운 감옥에서 끔찍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혹독한 고문은 세 살배기 아들이 굶주림으로 자신의 품에서 시름시름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과 함께 제일 먼저 순교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하느님께서는 심조이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는 고문으로 인한 상처와 이질로 두 달 넘게 고생하다 1839년 11월 11일(음력 10월 6일) 옥사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3살 아들도 몇 시간 뒤 숨을 거뒀다. 이렇게 해서 심조이와 그의 아들은 함께 체포된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순교의 월계관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