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세상 모두가 바쁜 계절인가 보다. 동네마다 잔치와 축제가 이어지고, 밭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작물들이 농부의 손길을 기다린다. ‘팀화요’ 역시 10월이 되면 농부님도, 우리도 한층 바빠진다. 들깨와 땅콩을 수확하고, 아직 캐지 못한 고구마가 남아 있어 날이 추워질수록 슬슬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이번 주 화요일은 벼 수확 일정이 잡혀 있었다. 벼 베기 역시 낫을 들고 직접 작업해야 하기에 손이 많이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의 벼 베기를 도와주기 위해 평창에서, 서울에서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참 고맙고 든든한 일이다.
문득 생각해 보면 요즈음 우리 밥상에서 쌀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TV를 틀면 너도나도 ‘저탄고지’를 말하며 탄수화물을 공공의 적처럼 취급하곤 한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3.9㎏으로 역대 최저다. 한 사람이 하루에 밥 한 공기 반 남짓을 먹는 셈이다. 이 수치를 보고 있으면 과연 대한민국을 여전히 ‘밥의 나라’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밥 대신 빵과 면이 식탁을 채우고, 밥은 되도록 줄여야 하는 탄수화물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밥을 먹지 않은 날은 확연히 힘이 없다. 한국 사회에서 밥이 주식이 된 데는 벼농사에 알맞은 지리적 환경이 오랫동안 작용했지만, 밥은 단지 주식만이 아니다. 계절을 이어오며 우리 공동체를 엮어 온 가장 정직한 온기가 담겨 있다.
1년 동안 정성으로 가꿔 온 토종 벼를 베어내는 화요일, 들판을 바라본다. 그곳엔 다백조·조동지·붉은차나락·멧돼지찰·북흑조가 논을 가득 메운 채 무르익어 가고 있다. 가을비가 다녀간 논은 물이 고여 진흙탕이었고 작업은 쉽지 않았다. 장화를 신은 사람들은 손에 낫을 들고 논으로 들어가 벼를 베고, 누군가는 베어낸 벼를 양지바른 곳으로 나르며 서로 손발을 맞췄다.
땀 흘려 일한 뒤 엄마가 편히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서로 아기를 돌봐 주는 풍경, 토종 벼가 자라는 논에서 갓 태어난 아이가 자라고 그 모습을 보며 어른들이 웃는 삶.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켜 내야 할 ‘지구밥상’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다 함께 둘러앉아 차린 밥상은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농부님은 직접 농사지은 땅콩을 넣은 고소한 밥을 지어 오셨고, 농사지은 배추로 구수한 된장국을 끓여 주셨다. 비건인 나를 배려해 육수 대신 다시마와 표고버섯을 우려내고 재래식 된장을 넣어 푹 끓여내 주신 그 정성에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밥과 배추된장국을 두 그릇씩 비워냈다.
배를 든든히 채운 뒤 다시 논으로 들어가 벼를 벴다. 논 한쪽에서는 기계 소음 대신 덜커덩거리며 둔탁하게 울리는 와릉이(수동 탈곡기) 소리가 퍼져 나갔다.
이처럼 햅쌀을 맞이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해 먹는 음식이 있다. 바로 약밥이다. 「삼국유사」 소지왕 설화의 오기일(烏忌日) 풍습에서 유래해 ‘약(藥)이 되는 밥’으로 이어져 온 약밥은 단순한 별식이 아니다. 한 해 동안 대지와 햇살, 그리고 농부의 땀방울이 응축된 가장 달콤하고 정성스러운 감사 기도다.
내가 짓는 약밥은 이번에 수확한 토종 벼 대신 햅쌀 찹쌀현미를 바탕으로 만든다. 가을이 되면 함께 쏟아져 나오는 제철 씨앗들, 곧 밤·잣·호두·땅콩·은행을 듬뿍 넣고, 우리 전통 간장으로 깊은 간을 맞춘 뒤 공정무역 유기농 원당으로 은은한 단맛을 더해 밥솥에 안친다.
1인당 쌀 소비량이 줄었다고 해서 밥의 가치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열심히, 더 정성껏 밥을 먹어야 한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영양분을 섭취하는 행위를 넘어, 땅을 살리고 토종 씨앗을 지키며, 낫을 들고 땀 흘린 농부의 손길을 기억하는 일이다. 기후위기 시대, 지구를 살리는 가장 일상적이고 강력한 투쟁은 바로 우리 밥상 위에 갓 지은 쌀밥 한 공기를 올려놓는 것에서 시작된다. 먹어야 지킬 수 있는 우리 쌀과 밥을, 더 열심히 먹어서 지키고 싶다.
올가을, 당신의 밥상에도 따끈한 햅쌀밥 한 그릇, 혹은 이웃과 나눠 먹을 고소한 약밥 한 그릇을 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쌀 한 톨, 씨앗 한 알에 담긴 지구의 평화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말이다.
레시피
재료
현미찹쌀 2컵, 밤 10알, 대추 10알, 은행 20알, 잣 반 컵, 호두 반 컵, 통들깨 4큰술, 가을향기간장 6큰술, 무스코바도 원당 6큰술, 참기름 2큰술
사전 준비
1. 현미찹쌀은 12시간 이상 불린다.
2. 밤 껍질은 까둔다.
3. 건대추는 물에 10분 담가 불린 후 씻는다.
조리 순서
1. 현미찹쌀은 물에 한 번 씻은 후 체에 밭쳐 물기를 뺀다.
2. 밤은 4등분 한다.
3. 건대추는 돌려 깎아 씨를 뺀 뒤 반은 돌돌 말아 대추꽃을 만들고 반은 채 썬다.
4. 호두는 적당히 부수고, 잣은 준비해 둔다.
5. 그릇에 가을향기간장, 무스코바도 원당, 참기름을 넣고 원당이 녹을 때까지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
6. 전기압력밥솥에 불린 현미찹쌀, 밤, 대추, 호두, 통들깨를 넣고, 5번의 양념장과 물 1컵을 부은 뒤 골고루 섞어 현미/잡곡 모드로 취사한다.
7. 밥이 다 되면 잣을 넣고 골고루 잘 섞은 후, 사각 통이나 틀에 담아 모양을 잡고 식힌다.
8. 완전히 식으면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서 접시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