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이봉금(아나스타시아)는 조선 왕조 치하 박해기 공권력에 의해 처형된 모든 순교자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로 알려지고 있다. 이봉금 복자화
1827년 2월 전남 곡성의 한 교우촌에서 교우들끼리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한 교우가 곡성 현감을 찾아가 교우촌을 밀고했다. 이 사건으로 곡성·장성·순창·임실·용담·금산·고산·전주까지 가톨릭 신자에 대한 박해가 확산됐다. 5월까지 3개월간 전개된 이 박해로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500여 명의 그리스도인이 체포됐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를 ‘정해박해’라 부른다.
정해박해를 지휘한 전주 감사 이광문은 전주 감영으로 압송된 그리스도인들을 귀양 보내거나 사형 선고를 하고도 무한정 옥에 가둬뒀다. 그래서 12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제야 처형된 순교자들이 적지 않았다. 정해박해 때 체포돼 기해박해 때 순교한 대표적인 인물이 복자 신태보(베드로)·김대권(베드로)·이일언(욥)·이태권(베드로)·정태봉(바오로) 등이다.
깊은 신심에 감동한 사제, 첫 영성체 베풀어
이번 호에 소개할 인물은 조선 왕조 치하 박해기 공권력에 의해 직접 처형된 모든 순교자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로 알려지고 있는 이봉금(아나스타시아, 1827~1839)이다.
이봉금의 부모인 이성삼(바오로)과 복자 김조이(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 출신이다. 이들은 정해박해를 피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 장성으로 몸을 숨겼다. 이봉금은 그해 장성에서 태어났다.
이봉금은 신심 깊은 부모로부터 신앙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그는 7살 무렵부터 하느님을 진심으로 흠숭하고 사랑했다. 10살이 되어서는 아침·저녁 기도뿐 아니라 모든 교리문답을 외웠다. 그 해 그는 장성 교우촌에서 사제를 뵐 수 있었다. 아마도 샤스탕 신부였을 것이다. 선교 사제는 이봉금이 어리지만 총명하고 매우 열심한 것을 보고, 성체를 영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에 감동해 첫 영성체를 베풀었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이봉금의 첫 영성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교사는 이 아이의 준비된 모습에 감동을 받아 아주 특별한 교리 시험을 치르게 하고는 아이에게 영성체를 허락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는 이 천상 잔치에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서 하느님 앞에서 그토록 눈물을 쏟았던 봉금이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는 기쁨과 감사한 마음에 북받쳐 그 어느 때보다 더 눈물을 쏟았다. 그날은 그야말로 이 집안의 잔칫날이었으며, 아이의 행복에 행복했던 아이의 부모는 자신들이 쏟았던 용감한 수고에 보상을 받은 것 못지않게 감동하였다. 이 아름다운 시작은 오로지 성장의 길로 내달아 그녀가 온 힘으로 열성을 쏟고 있는 가운데 하느님은 그녀에게 박해의 시련을 거치도록 허락하셨다.”
옥사 전 순교 당부한 어머니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조이는 딸 이봉금을 데리고 전라도 광주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으로 몸을 숨겼다. 홍재영은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홍낙민(루카)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체포됐으나 배교해 광주로 유배됐다. 이후 그는 1832년 사면돼 유배지에서 풀려났으나 그대로 광주에 정착했다.
김조이와 이봉금 모녀는 홍재영의 집에 은신한 지 얼마 안 돼 홍재영 가족과 그 집에 숨어지내던 이조이(막달레나)와 최조이(바르바라)와 함께 체포돼 전라도 관찰사가 있는 전주 감영으로 압송됐다.
어머니 김조이는 모진 고문과 이질로 수감된 지 5개월 만인 1839년 10월에 옥사했다. 김조이는 숨을 거두기 전에 어린 이봉금에게 배교하지 말고 하느님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라고 단단히 타일렀다. 김조이는 봉금에게 “너는 분명히 배교할 거다”라고 하자 이봉금은 “아니다”라고 했다. 다시 김조이는 딸에게 “만일 네가 고문을 당하면 너는 금방 굴복할 것이다. 네겐 굳건하게 버틸 힘이 없어”라고 하자 어린 이봉금이 “충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배교 회유에도 신앙 고백
어머니 김조이가 우려했던 대로 포졸들은 이봉금에게 윽박지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배교를 강요했다. 신문을 당할 때마다 이봉금은 “7살이 되기 전에는 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랐지만 7살 이후로는 하느님을 제대로 흠숭하고 있는데 어떻게 제가 오늘 그분을 부인하기를 바라십니까. 그분을 모욕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전주 감사는 곧장 이봉금에게 매질을 가하게 했다. 포졸과 옥리들은 이봉금에게 “배교하고 목숨을 건지라”고 간청했으나 그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봉금은 여러 차례 감사 앞에 끌려가 신문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어머니가 먼저 옥중에서 순교하는 모습을 지켜본 후로는 더욱 순교를 갈망했다.
드디어 이봉금에 대한 사형이 선고됐다. 전라 감사는 어린아이를 참수할 수 없어서 교살을 명했다. 이봉금은 1839년 12월 5일에서 6일 밤사이 전주 감영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12살을 넘지 못했다.
다블뤼 주교는 순교자 이봉금에 대해 ‘순교’와 ‘동정’의 이중 화관을 얻은 조선 가톨릭교회의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라고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