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어느 산골.
참나무와 밤나무를 쪼개 지붕을 두른 너와집이 양지바른 산자락에 외롭게 서 있다. 텃밭에서는 어른 키보다 큰 옥수수대가 산들바람에 춤을 춘다. 들판 너머 신작로 끝에서는 시외버스가 뽀얀 흙먼지를 날리면서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다.
화가 이수영(다미아노)의 그림은 눈물겹도록 정겹다.
어릴 적에 등지고 떠나온 고향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고향이 맑은 수성(水性)물감 속에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도화지의 속살까지 드러나는 수채화의 특성 때문인지 순결미마저 느껴진다.
화가 이수영은 춘천교구 강촌본당 신부다. 강촌 어귀는 개발바람을 타고 볼썽사납게 파헤쳐졌지만 성당과 그 주변은 평온하다. 기자가 성당에 들어서자 이 신부가 너무 반갑게 맞아주었다.
“농사철이 시작돼서 그런지 요즘은 우편 배달부 아저씨 보는 게 고작이에요. 뜻밖에 사람구경을 하게 되니 어찌 반갑지 않겠습니까.”
이 신부의 그림 테마는 강촌이다. 산너머 공소에 다녀오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으면 스케치북을 꺼내 들고 그려온 그림들이다.
‘추곡리 풍경’ ‘팔미리 가을’ ‘공소 가는 길’ ‘방곡리의 겨울’…. 작년 11월 첫 개인전에 내놓은 작품들의 이름만으로도 강촌의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릴 수 있다. 그때 화랑에 들른 관람객들은 “아름답다”는 칭찬보다 “행복했습니다”라는 말을 더 많이 남겼다.
“자연은 참으로 질서정연합니다.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에도 완벽한 균형과 비례가 숨어 있어요. 즉흥적이고 불규칙한 인간 세상과는 다릅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흔히 창조주의 신비를 느낀다고 감탄하지요. 그건 바로 균형과 비례가 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소 의외다. 그림만 보아선 서정성이 넘칠 것 같은 이 신부는 딱딱하기 짝이 없는 비례·형태·균형 같은 ‘구조’ 이야기를 한참동안 했다. 또 아그리파상 같은 석고모델과 데생 습작 도화지들이 사제관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미대 입시준비를 합니까?”라고 묻자 이 신부는 “어떨 때는 우두커니 앉아서 석고모델을 1시간 이상 쳐다본다”며 “사물을 꿰뚫어보는 관찰력이 있어야 형태를 생략하고 단순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굳이 구분하자면 그의 그림은 자연을 단순화된 형체로 집약해서 화면에 새롭게 담아내는 세잔(Paul Cezanne) 화풍이다.
그는 1999년 강촌본당에 부임해서부터 붓을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보면 5년 경력의 붓 놀림이 아니다.
“신자 대여섯명이 모여 있는 공소에서 미사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냥 놓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여가를 좀 더 건전하게 보내는 방법을 후배 신부들에게 보여주고 싶고요.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질서를 찾아내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그는 워낙 동안(童顔)이라 밖에 나가서 보좌신부라고 말해도 사람들이 믿을 것 같다. 하지만 교구청에서 중책을 두루 거친 17년차의 중견사제다.
이 신부는 “가난이 무엇인지 알고 신자 한명 한명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우쳐주는 시골성당 신부 생활이 너무 행복하다”며 “3년 후 사제서품 20주년 때는 더 큰 ‘행복이 느껴지는’ 그림을 선보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