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뚜껑에 놓아둔 미나리 뿌리에서 파란 싹이 나왔다.
미나리 뿌리를 버리지 않고 밑동을 잘라 담아두었는데 신기하게 싹이 올라온 것이다. 주방에서 함께 일하는 크리스티나 자매는 “부활의 신비가 따로 없네”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주방 바깥을 치우다 기차소리에 허리를 펴고 담 밖을 쳐다보았다. 경부선 열차가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는 먼 산과 어울려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데 기찻길 아래 들판에 시선이 닿는 순간 깜짝 놀라서 무릎을 쳤다.
“어머! 올해부터 우리 가족들 돌미나리 뜯으러 못 나가겠네.”
마을 앞 들판에서는 1년 전부터 공사차량 소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고속철도와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푸르던 논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볼썽사납게 쌓아올린 긴 도로가 나고 있다. 이제 가족들과 논두렁에 나가 돌미나리를 뜯고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기는 다 틀렸다. 둔하게도 항아리 뚜껑에 핀 미나리를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아침 설거지를 부지런히 끝내고 가족 몇 명과 기찻길 옆 논둑으로 미나리를 뜯으러 간다. 옆구리에 형형색색의 소쿠리를 끼고 마을을 나서는 가족들은 소풍을 가는 아이들처럼 좋아한다.
좁은 논둑을 걷다 지천으로 널린 돌미나리가 나타나면 모두들 야단이다. 인철이는 미나리 뜯을 생각은 안하고 둑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훼방만 놓는다. 데레사 자매님은 습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금방 한 소쿠리를 채운다.
일어설 때가 되면 안나 자매님은 “내일 또 나오자”면서 몇 번씩 꼬신다. 그렇게 뜯어온 돌미나리는 초무침을 해서 가족들 저녁상에 올린다.
이제 돌미나리를 뜯는 즐거움은 영영 사라진 것 같다. 사라진 것이 어찌 돌미나리뿐이겠는가.
파란 논밭 위를 한가로이 날아다니는 하얀 비둘기가 사라졌고 가을 바람에 살랑거리는 황금 빛 벼들이 사라졌다. 추수가 끝난 벌판에 하얗게 내려앉는 초겨울 새벽서리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도 사라졌다.
급기야 지난 여름에는 새끼 청개구리가 마을 주방에 있는 화분으로 피난을 왔다. 그때 우리들은 그 예쁜 청개구리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며칠 동안 애완동물 대하듯 했다.
한 자매님은 청개구리와 사랑에 빠져 “어제는 어디서 잤어?” “점심은 먹었어?” 하며 말을 걸곤 했다. 논밭 보금자리를 인간들에게 빼앗긴 ‘슬픈 피난민’이라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자연은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생명의 보금자리다. 그 소중함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굉음을 내며 들판을 파헤치는 중장비와 흙먼지 날리며 들락거리는 육중한 트럭을 보면서 머지 않아 인간도 돌미나리와 청개구리 신세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