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내뱉는 말 중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因緣)”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인(因)이 어떤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면 연(緣)은 그러한 원인이 구체화될 수 있게 도와주는 이차적 요인들이다. 씨앗이 나무 한그루의 인(因)이라면 물 공기 햇빛은 나무의 연(緣)인 셈이다. 이처럼 인과 연이 만나야 무슨 일이든 벌어진다.
이 인연법에 따르는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세상 만사를 인과 연의 만남으로 파악하면서 사건이나 사물 자체의 독자성을 보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부모님의 ‘씨앗들’이 서로 만나(因) 인간의 형태가 이루어진 뒤 온갖 음식을 받아먹으며(緣) 오늘날 이런 모습으로 변해왔다.
부모님의 ‘씨앗’은 또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빗물과 땅속의 영양분을 빨아들여 자란 논밭의 오곡백과를 먹고 만들어졌다. 그러니 엄마와 아빠의 씨앗 속에 그로 인해 생겨난 내 안에 삼라만상이 이미 들어 있는 셈이다. 더욱이 수십억년 세월 동안 비추이고 있던 햇빛과 유유히 흘러온 강물을 받아들여 자란 것들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나의 생명이 되었으니 내 현재 삶 속에는 이미 수십억년의 세월도 녹아 있는 것이다. 그 엄청난 물 중에 하필 그 물방울을 빨아들인 그 풀잎을 내가 먹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인연의 실상이다.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그이와 이 큰 길에서 옷깃을 스치다니 이것 보통 인연이란 말인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와의 인연이란 더 말해 무엇하랴.
이러한 것들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서기전 563~483)의 통찰이다. 이러한 인연법 즉 연기(緣起)는 불교 사상의 기초다. 이것은 ‘나’라는 실체가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의 관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그것도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무아론’(無我論)과 연결된다.‘무아’란 말 그대로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독자적이고 불변하는 영원한 본질 실체란 없다. 한마디로 무상(無常)하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 자체는 물론 행복을 추구하는 ‘나’의 실체 역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준 이가 바로 붓다(Buddha)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사람이 태어난 뒤(生) 늙고(老) 병들고(病) 결국은 죽게 된다 (死)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아주 단순한 듯 하지만 그는 그 누구도 쉽사리 풀지 못하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에 격정적으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결국 그는 왕자로서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해 29살 되던 해 왕궁을 박차고 나온다. ‘위대한 출가’다.
그 후 6년에 걸쳐 극단적 고행을 하던 어느날 저녁 그는 명상 속에서 수 천번 이상 계속 되었던 자신의 전생의 모습들을 기억해 내게 되었고 사람들은 스스로 행한 업(業)에 따라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을 비롯해 세상의 실상(苦 고통)과 그 원인(集 집착) 및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滅 열반) 그 상태에 이르는 여덟가지 길(道 구체적으로 八正道) 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깨달은 이 즉 ‘붓다’가 되었다. 이것을 한자로 음역하면 불타이고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에서 석가모니 내지는 석가족 출신 중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이라는 뜻으로 석가세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붓다는 그 후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80세 되던 해에 열반에 들었다. 열반(涅槃)이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의 한자어 음역으로서 타오르던 번뇌의 불꽃이 ‘꺼져 버린’ 상태를 뜻한다. 번뇌와 탐욕이 꺼져버렸으니 그곳은 고요함의 세계이다. 그래서 다른 말로 적멸(寂滅)이라고 번역한다. 불교는 바로 이 열반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이러한 열반은 한마디로 붓다의 깨달음과 같은 것이며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다.
신화적 세계관에 따르면 ‘해탈’은 업에 따라 돌고 돌던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탈신화해서 해석하면 그것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아무 데도 얽매임이 없는 대자유의 세계를 뜻한다. 그렇게 보면 깨닫고 난 세계가 바로 열반이자 극락이고 깨닫지 못한 무지의 세계가 바로 지옥이 된다.
흔히 극락과 지옥을 사후 세계의 전형처럼 간주하기도 하지만 사실 불교는 사후세계에 대한 기대보다는 살아서 붓다의 깨달음과 같은 것을 추구하는 수행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