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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본 한국의 외방선교회역사 -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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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만 해도 사제수가 적어 시골 신자들은 신부 얼굴을 일년에 서너번 볼까말까 할 정도였다. ‘가뭄에 콩 나듯’ 새 신부가 나오면 신자들은 서로 자기네 본당으로 모셔가려고 아우성이었다.

신부 입장에서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교통편을 이용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산골짜기 성당과 신자들을 찾아 다니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사제수가 적다 보니 이래저래 힘든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1933년 10월 전남지방 선교를 위해 아일랜드에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신부 10명이 한꺼번에 도착하자 대구와 광주 등지에서는 “신부가 홍수 났다”며 뛸 듯이 기뻐했다.
당시 전남은 타지방에 비해 인구가 많았는데도 선교활동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선교기반이 없는 그 지역에 들어가 활동할 선교사도 없었고 막상 선교사 몇 명이 진출한다 해도 산야와 섬이 많아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인 신부 4명이 전남지방 전체를 무대로 사목을 하고 있었으니 사실상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임 맥폴린(Owen Mc
olin 林) 신부 등 10명의 신부들은 우선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에 짐을 풀고 6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웠는데 다들 “한국어는 라틴어보다 더 어렵다”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중국 상해로 가는 도중에 교황청과 아일랜드 본부가 선교지를 조정 변경하는 바람에 한국으로 발길을 돌린 선교사들이다. 한국어는 고사하고 문화와 지리에 대한 기초정보도 없이 도착했기 때문에 적응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한국어 공부를 마친 이들은 목포에 터를 잡았다. 전남 도청 소재지인 광주에는 신자 가정이 겨우 20세대였으나 목포와 인근 마을에는 800여명의 신자가 거주하고 있어 선교본부로는 그곳이 더 제격이었다.

“이국 땅에서 맞이한 첫 성탄파티 때 식탁에 나온 송아지 입에 담배를 피워 물리며 장난을 친 기억이 난다. … 우리는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 나주 제주 등의 6개 본당을 처음 맡았다. 당시 나는 광주에서 첫 사목활동을 했는데 신자는 150명 남짓했다. 그리고 관할공소가 26개나 되어 전교회장 복사 등과 함께 공소방문을 나가면 공소 회장댁에서 오래 묵어야 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주로 전교회장을 통해 ‘요리강령’이라는 그림 교리책으로 전교했다.”(매리난 신부 회고)
추가로 파견된 회원까지 합쳐 총 19명의 신부들은 분주하게 선교영역을 넓혀갔다. 순천에 파견된 간 토마 신부와 지 브라이언 신부는 미국에서 보내온 5 000달러로 성당을 지었다. 구인란 신부도 6 000달러를 들여 광주에서 웅장한 벽돌조 성당(북동성당의 전신)을 완공했다. 회원들은 성당을 세우고 예비신자를 모으는 등 눈코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 명 다니엘 신부를 폐결핵으로 잃었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골롬반 회원 60명 가운데 첫 사망자로 기록돼 있다.
골롬반회는 1937년 광주지목구와 전주지목구가 설립되는 등 전남지방의 선교기반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1938년 춘천으로 진출했다. 구인란(Thomas Quinlan 具)신부는 춘천 안 바드리시오 신부는 원주를 맡았다. 당시 강원도에는 한국인 신부와 프랑스 신부 11명이 9 000명의 신자를 돌보고 있었다.

훗날 춘천교구장이 된 구 신부는 죽림동본당에 부임해 성당 구내의 초라한 움막에 기거했다. 그때는 사제관은 고사하고 보리와 강냉이조차도 배불리 먹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신자들은 “구 신부는 자신을 위해서는 두벌 옷도 갖기를 꺼리고 남을 돕고 기쁘게 해주는 일 밖에 모르셨다”(죽림동본당 70년사 72쪽)고 회고했다.
골롬반 신부들은 일제 강점기와 6.25사변의 격동기에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그 시련은 박해시대에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 못지 않았다.
1941년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가세한 일본은 적성국(敵性國) 국민이라는 이유로 외국인 신부들은 모두 잡아 들였다. 목포에서 가택연금을 당한 골롬반 신부들은 광주 북동성당 강원도 홍천 등지로 이송되었다. 제주도에서 사목하던 3명의 신부는 신자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죄목으로 2∼3년씩 옥살이를 했다.

그때 일본 순경의 감시가 얼마나 심했던지 지 브라이언 신부는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게 차라리 낫다. 신자들과 떨어져 감옥에 있으면 감시가 덜할 것 아니냐”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길 헨리 신부는 이질에 걸렸는데도 약을 써보지 못하고 해방을 일주일 앞둔 1945년 8월 6일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러나 이어 닥친 6.25 사변의 시련에 비하면 이 정도는 견딜만한 고통이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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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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