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에서 가톨릭 교회는 왜 박해를 받았을까? 그리고 이들 3국에서의 가톨릭 교회 박해는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고 차별성이 있나? 박해를 주제로 한·중·일 3국의 초기 교회사를 새롭게 이해할 방안은 없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해결해줄 가톨릭 교회사 관련 국제 학술 심포지엄이 모처럼 열렸다.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는 ‘신유박해’를 주제로 첫 국제 학술 심포지엄을 9월29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개최했다.
‘동아시아 천주교의 수용과 박해’를 주제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은 한국 가톨릭 교회에 있어 시련과 성장의 양면을 담고 있는 신유박해의 역사성을 보다 넓은 마당에서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 한· 중· 일 동아시아 3국이 겪었던 초기 교회의 박해사를 비교 검토하는 자리였다.
이날 국제 학술 심포지엄에서는 이원순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와 서종태 박사(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구웨이민 교수(중국 상하이 화동사범대학) 고노이 다카시 교수(일본 동경대학교)가 각국의 가톨릭 교회 박해사의 원인과 성격을 연구 발표했다.
연구 발표자들은 중국은 유·불·도 3교를 기조로 한 전통 사회였고 일본은 유·불·신 3도의 공존 사회였으며 조선은 무속과 불교가 사회적 밑바탕에 깔려있던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가톨릭 신앙의 수용과 수용 이후의 대응 신앙 실천 과정이 대조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경우 예수회의 직접 선교에 의해 가톨릭 신앙이 전파된 후 ‘기리시탄’이란 이름하에 선교의 토대를 구축했으나 철저한 박해로 교회의 조직이 공식적으로 소멸되고 이른바 ‘가쿠레 기리시탄’으로 잠복하여 변현된 신앙생활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특성적 교회사를 전교했다.
중국 교회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예수회 성직자들의 ‘보유론적’ 전교 방침에 따라 직접 선교 활동을 통해 기초를 굳힌 교회였으나 명과 청의 정권 교체기를 거치면서 황제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가톨릭 교회에 금교령이 내려져 박해의 시련을 겪게 됐다.
조선 교회는 중국과 일본 교회와는 매우 다른 학문적· 사상적 고민을 겪은 끝에 조선 후기 사회에 자리를 차지한 가톨릭 교회로 성직자 없이 자율적으로 창설된 교회였다. 이후 10년간 성직자를 모시지 못한 교회이면서도 자율적 신앙을 깨우친 평신도들만의 전교 활동으로 조선 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다른 두 나라의 교회사와도 대비된다.
‘가톨릭 신앙의 동점(東漸)과 동아시아 전통사회’를 발표한 이원순 교수는 “동아시아 3국은 세계사적 보편 신앙인 가톨릭 신앙을 대면 수용 봉행하면서도 뚜렷한 개별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이들 3국의 교회사는 세계사 보편 속의 특수의 전개이고 개별적 특성 가운데 보편적 일치를 다지는 새로운 세계사의 흐름을 따르는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새로운 역사 추구의 역사적 응전이었다”고 강조했다.
‘신유박해의 배경과 성격’을 발표한 서종태 박사는 “노론 벽파가 신유박해를 단행한 것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조의 개혁 정치를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면서 “신유박해는 기득권 세력인 노론 벌열이 개혁 세력인 체재공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사건이었다”고 주장했다.
‘청초 대천주교 정책의 변천’을 발표한 구웨이민 교수는 “청나라 초기인 순치· 강희· 옹정제 시대 당시 조정은 인재 초빙과 인심 수습에 부심해 서양 선교사와의 협력을 갈구해 가톨릭 교회의 교세가 급성장했으나 교황청이 선교지의 문화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정책을 반대해 박해가 시작됐고 옹정시대에는 황제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금교령이 내려졌다”고 가톨릭 교회 박해 배경을 설명했다.
‘일본에서의 기리시탄 박해의 역사성’을 발표한 고노이 다카시 교수는 “일본 가톨릭 교회의 박해는 불교세력 황실· 공가(公家)세력 막번 봉건세력에 의해 자행됐는데 가톨릭이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 불을 혼란에 빠뜨리는 사법으로 마침내 일본을 정복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간주 되면서 박해를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