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이 조금 넘는 한국교회사의 전반부 100년은 피의 박해시대였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다행히 박해의 광풍은 멎었지만 교회는 파탄 상태나 다름없었다. 이때 흩어진 신자들을 모으고 쓰러진 성당을 다시 세운 이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벽안의 선교사들이었다.
특히 파리외방전교회 메리놀외방전교회 성골롬반외방선교회 등이 이 땅에 들어와 신앙의 불씨를 다시 지피고 교회를 재건한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들 3대 외방전교회의 초창기 선교 역사를 회고한다.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 기도로 얼룩진 초창기 선교 역사는 새로운 천년을 시작하면서 불붙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 해외선교에 활동에 값진 교훈이 될 것이다. 또 점점 잊혀져 가는 서양 선교사들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는데도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평안도 포교권을 위임받고 1923년 5월 홀로 한국에 첫 발을 내딛은 방(方 Patrick J.Byrne) 신부는 서울 주교관에 들러 뮈텔 주교에게 인사를 한 후 압록강변 의주에 본부를 설치했다. 그해 10월 길(吉 Patrick H.Cieary) 신부 11월에 목(睦 John E.Morris) 신부가 입국해 지부장 방 신부와 합류했다.
하지만 이역만리 미국에서 온 벽안의 신부들은 여름에는 이질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고 겨울에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방 신부는 입국하자마자 그해 여름에 이질에 걸려 혼자서는 옷도 입지 못할 정도였다. 편지 끝에 오리 그림을 그려 넣곤 했던 방 신부는 미국 메리놀 본원으로 띄운 편지에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부리를 묶어 맨 말라빠진 오리를 그려 넣어 자신의 병세를 전했다.
“언젠가는 이곳 풍토에 적응하리라 믿습니다. 이질 덕택에 군살을 빼는 데 성공했고 이제는 무더운 날씨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운이 좀 없긴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방 신부의 편지에서)
특히 겨울이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압록강변의 추위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어떤 신부는 일본인이 개발했다는 비누 크기 만한 주머니 난로를 가죽끈으로 손에 묶고서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성당 내부가 얼마나 춥던지 우리는 성당을 ‘거룩한 냉장고’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곳 신자들은 냉장고 같은 냉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사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남아 기도합니다. 때로는 영성체를 하기 전에 포도주가 얼어 손으로 컵을 감싸고 입김을 불어서 녹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방 신부의 편지에서)
이듬해에 젊은 신부 3명과 메리놀회 수녀 6명이 입국하는 등 미국에서 선교사들이 속속 도착함에 따라 메리놀회의 평안도 선교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개신교가 관서지방에서 파죽지세로 교세를 확장한 까닭에 평안도 전역의 개신교 신자수는 41 500명이나 되었으나 천주교 신자수는 4 800명에 불과했다.
메리놀회 신부들은 우선 먼저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복음의 씨앗을 뿌린 곳과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는 곳 그리고 새로 입교한 신자들이 많은 곳에 우선적으로 성당을 세웠다. 진사동성당 신의주성당 안주성당 등이 그때 지어진 성당들이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신부들이 유럽의 전형적인 고딕양식을 외면하고 기와를 얹은 절충형 연와제(煉瓦製) 성당을 지은 것이다. 그 이유는 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위해 창설된 메리놀회가 상징적 의미로 미국 오시닝 본부 건물을 중국식과 서양식을 절충해 지었는데 이후 포교지에서 성당을 신축할 때도 항상 이 양식을 택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는 포교지의 전통 문화와 풍습을 존중하려는 서양 선교사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메리놀회는 1926년 봄 선교 초창기임에도 불구하고 평안북도 최북단의 산악도시인 중강진에까지 시야를 넓혀 본당 신설 작업을 추진했다. 다소 엄격하고 보수적인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과 달리 신대륙 개척민의 후손답게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선교에 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방 신부는 본당 신설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멀고 험준한 중간진까지 썰매를 타고 다녀온 후 이렇게 기록했다.
“중강진 주민들이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정을 알고 나니 깊은 산간 지방의 구령사업이 지형적 장애로 인해 지체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일단 밭가는 쟁기에 손을 댄 이상 돌아설 수 없고 비켜설 수도 없습니다. 수확이 극히 적을 지라도 계획과 활동을 멈출 수 없습니다.”
특히 자동차로 이틀이나 걸리는 중강진을 썰매를 타고 이틀만에 도착했다는 여행 기록에는 짜릿한 생동감이 넘쳐난다.
“작은 말이 썰매와 사람을 끕니다. 계곡을 따라 얼어붙은 하천 위를 바위를 피해 달리는 기술은 요술에 가깝습니다. 비탈길을 달려 내려갈 때는 그 망할 놈의 악귀가 뒤에서 쫓아오기나 하는 것처럼 마차는 쏜살같이 달려 내려갑니다. 말은 뒤에 붙은 썰매에 치이지 않으려고 나는 듯 달리고 썰매꾼은 미친 캥거루처럼 껑충껑충 뛰어댑니다. 우리들은 마차에 매달리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1927년 평양교구(지목구)가 신설됨에 따라 메리놀회는 평양에서 북쪽으로 10㎞ 떨어진 서포에 교구 본부 겸 지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속속 입국하는 메리놀 수녀들과 함께 양로원과 고아원을 열고 시약소를 운영했다.
메리놀 수녀들 중에 미국 본원에서 수련기간을 마친 장정온(앙네따)수녀와 김 말가리다 수녀가 끼어 있어 전교사업이 한결 수월하기는 했으나 신부와 수녀들의 열정과 노고에 비해 성과는 더디게 나타났다. 의학박사인 멜시 수녀는 매일 오전에는 평양 시내를 돌아다니며 병원에 갈 형편이 안 되는 환자를 치료해 주고 오후에는 수녀원 한 쪽에 문을 연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곤 했다.
그때 메리놀 선교지부의 사제는 17명 수사 2명 수녀 13명. 이들은 11개 구역으로 흩어져 선교활동은 물론 학교(11개) 병원(3개) 양로원(1개) 등지에서 가난한 이들을 보살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 메리놀외방전교회
200년이 조금 넘는 한국교회사의 전반부 100년은 피의 박해시대였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다행히 박해의 광풍은 멎었지만 교회는 파탄 상태나 다름없었다. 이때 흩어진 신자들을 모으고 쓰러진 성당을 다시 세운 이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벽안의 선교사들이었다.
특히 파리외방전교회 메리놀외방전교회 성골롬반외방선교회 등이 이 땅에 들어와 신앙의 불씨를 다시 지피고 교회를 재건한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들 3대 외방전교회의 초창기 선교 역사를 회고한다.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 기도로 얼룩진 초창기 선교 역사는 새로운 천년을 시작하면서 불붙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 해외선교에 활동에 값진 교훈이 될 것이다. 또 점점 잊혀져 가는 서양 선교사들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는데도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