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는 교회를 정화하고 신앙을 담금질하는 용광로 다. 103위 한국 성인들은 모두 박해로 치명한 순교자들이다. 1784년 조선에 첫 가톨릭 신앙공동체가 탄생한 이후 약 100년 가까운 박해로 1만명 이상이 순교했고 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골과 외딴 오지에서 신앙의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박해가 혹독할수록 대지를 적신 순교자들의 보혈은 더 많은 신앙의 싹을 꽃피었다. 순교자들의 거룩한 죽음 위에 뿌리내린 한국 천주교회는 이제 세계교회가 주목할 만큼 성장했다.
새천년을 맞아 첫번째 맞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을 지내며 103위 순교 성인을 낳게 한 박해시대의 상황을 재조명한다. 자료 제공 한국교회사연구소
우리나라 최초의 박해는 1785년 을사년에 추조 곧 형조의 관리들이 명례방(지금의 명동)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신자들을 체포 김범우를 단양으로 유배시킨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그러나 조정의 지시에 의한 최초의 박해는 이른바 진산사건으로 불리는 1791년의 신해박해다. 진산 땅의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파묻은 것이 드러나 사형을 당한 것이다.
이후 1879년 파리외방전교회의 드케트 신부가 중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약 100년간 크고 작은 박해가 이 땅을 순교자의 피로 물들였다. 이중 1801년의 신유박해와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를 4대 박해라고 부르며 이 4대 박해로 순교한 분들 가운데서 103위 성인이 탄생한 것이다.
▲박해의 배경
박해의 원인과 배경은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상적으로 당시 조선은 유교를 문화적 지주로 삼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정학(正學)인 유학에 배치되는 서학(천주교 교리)은 사학(邪學)으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조상제사를 금하고 만인 평등을 내세우는 천주교는 당시의 사회 윤리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악한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정치적 배경도 박해의 주요한 원인이 됐다. 초창기에 천주교를 신봉했던 사람들은 남인계열의 소장학자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남인 사이에서도 천주교에 우호적인 친서계와 비판적인 공서계로 나뉘어졌다. 공서계 인물들은 노론 벽파와 함께 친서계 인물들이나 이에 동조하는 노론 시파 세력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밖에 외국 선교사 영입을 위한 신자들의 활동이 서양 오랑캐의 앞잡이 역할을 한 반역행위로 인식된 것이나 또는 밀고자나 배교자들의 고발도 박해의 한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작용해 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신유박해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첨정을 시작하면서 노론 벽파의 주도로 이루어진 박해. 대왕대비는 신유년인 1801년 1월10일(양력 2월22일) 박해령을 내리면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도록 했다. 이에 따라 기호 남인의 거두인 권철신(암브로시오)을 비롯해 이가환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 등 지도층 신자들이 체포돼 참수 또는 유배형을 받았다. 또 충청도에서는 내포의 사도 라고 불리는 이존창이 붙잡혀 참수됐다.
박해는 3월12일 주문모 신부가 의금부에 자수하면서 더욱 가열됐으며 그 해 9월에는 이미 체포령이 내려졌던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그가 지니고 있던 백서 가 발각됨으로써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신유박해는 12월2일 이미 내린 사형선고는 속히 집행하고 판결을 내리지 않은 죄인들에 대한 신문도 속히 끝내고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말라는 토사교문 이 반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끝났다.
신유박해로 인해 약 100명이 순교했고 400명 정도가 유배되었으나 이들 순교자들은 아무도 시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할 때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부터 그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