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를 지나 추석이 코 앞에 다가왔다. 늦더위 끝에 살짝 묻어나는 시원한 한자락 바람에서 가을이 성큼 다가선 것을 느끼게 된다. 순교자성월이라서 그런지 가을 초입에 들어선 한강변의 성지 절두산과 새남터에서는 순교자들의 고귀한 순교혼이 더욱 짙게 배어 나오는 듯하다.
◇절두산성지
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서 내려 당산철교쪽 길을 따라 5분 정도 걷다보면 한강변에 우뚝 선 절두산성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요즘 절두산 성지는 공사가 한창이다. 성지종합발전계획에 따라 50억원을 들여 대대적인 절두산성지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순교자 기념성당과 성해실 보수 순교기념관의 박물관 용도변경 순교자 기념광장 건립 절두산 순교자현양탑 건립 교회사 유물공원 조성 등의 공사가 끝나면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성지로 거듭 태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절두산성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상을 비롯해 오타 줄리아 묘 박순집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로 시작된다. 특히 일가족 16명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는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순교자 묘역을 지나면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이 우리 전통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말없이 대변해 주고 있다. 접시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의 전통적 의관인 갓을 구멍을 갖고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진 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한국 최초의 대주교인 노기남 대주교가 타고 다녔던 포니 승용차 전시장을 지나면 절두산기념관에 이른다.
한국교회의 최대 박물관인 이 순교기념관에는 교회사적 유물 750점 서적류 1258책 각종 형구 3000여점이 소장돼 있다. 그 중에서도 천주교회사에서 귀중한 자료로 손꼽히는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이순이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이 눈길을 끈다.
기념관 밑에 있는 지하묘소에는 병인박해 때 절두산에서 참수된 28위의 성해가 모셔져 있다. 박해의 정도와 규모로 보아 순교자가 수천명에서 1만명까지 추산되지만 이의송 일가족을 포함해 31명의 이름만 확인된 상태다.
생긴 모습이 용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용두 또는 잠두로 불렸던 이곳은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죽어갔길래 그 이름이 절두산일까.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은 그때의 피의 순교를 아는지 모르는지 속절없이 흐르고 있다.
◇새남터성지
지하철 1호선을 타고 한강철교를 지나기 직전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전통 한옥 기와집이 보인다. 바로 그 기와집이 순교성지인 새남터 기념성당이다.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처음 처형당한 뒤 수많은 신앙인들이 거룩한 순교의 피를 뿌린 장소. 서소문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 라고 한다면 이곳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모두 11명의 성직자가 치명돼 사제들의 순교지 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주변에 수목이 울창했다지만 지금은 주위의 고층 아파트에 파묻혀 있어 왜소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성당으로 들어가 숨져간 성직자들의 거룩한 죽음을 대하면 그런 선입견은 천주교에 대한 자긍심으로 바뀐다.
성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님이 반갑게 맞이한다. 단아한 한복 차림의 성모상은 이곳을 찾은 모든 이에게 마음의 평화를 줄 만큼 자애롭다. 기념성당 입구에는 지난 84년 이곳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인이 새겨진 대성당 머릿돌이 놓여있고 기념성당은 1층의 소성당과 2층의 대성당으로 돼있다. 건축양식이 기존 교회건축양식과 달리 전통 한옥식이어서 그런지 더욱 친근감이 든다.
1층 소성당 입구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11명의 성직자 이력을 자세히 적어놓은 안내문이 걸려있다. 그 가운데 한국 땅을 밟은 최초의 외국인 신부이자 중국 출신인 주문모 신부의 생애에 눈길이 머문다.
주 신부는 목자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조선 교우들을 위해 1795년 북경교구에서 파견한 인물이다. 주 신부는 조선에 와있는 동안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무수히 죽어가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고민 끝에 주 신부는 북행 길에 나섰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들과 생사를 함께해야 겠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려 새남터에서 최후를 맞았다.
주 신부 순교 후에도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가 이곳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으며 그로부터 7년 후인 병오년에는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박해의 칼날을 받았다.
◇당고개성지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올라 다다른 당고개성지. 첫 느낌이 성지치고는 너무 작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절두산 새남터 서소문과는 규모면에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작다.
하지만 옛사람들이 청계산의 아침 구름 관악산의 저녁 안개 동작나루의 돛단배 등 이른바 용산8경 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당고개를 꼽았을 만큼 전망이 뛰어나다.
이곳에서는 기해년(1839년) 12월27일(음력)부터 이틀에 걸쳐 신자 10명이 처형됐다. 성지 전체 면적은 100여평이 될까 말까 하고 가운데 순교자 현양탑이 있다. 신앙의 증거자 11명의 목숨을 앗아간 장소에 세운 야외 제대가 순례자의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순교의 화관을 쓴 교인은 박종원(아우구스티노) 홍병주(베드로) 권진이(아가다) 이경이(아가다) 손소벽(막달레나) 등 9명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처형됐는데도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순교자가 있다. 최경환의 부인이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다. 그 이유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순례자들의 가슴이 뭉클할 정도다.
본래 부모와 자식을 함께 투옥시키는 것은 국법에도 없었지만 큰아들 최양업을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유학 보낸 최경환 일가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옥에 같이 투옥된 어린 아이들에게 밥이 나오지 않자 이성례는 어쩌다 밥 한덩어리가 나오면 모두 애들에게 먹이고 자신은 굶기가 일쑤였다. 마침내 세살짜리 막내는 옥에서 엄마의 마른 젖을 빨다 죽고 말았다.
이성례는 자식 네명을 옥에서 굶겨 죽일 것 같아 배교하겠노라고 말하고 나왔다. 아이들과 문전걸식하던 이성례는 얼마 후 자식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에 남편 최경환이 있는 감옥으로 다시 들어가 치명의 길을 걸었다.
어머니로서 인간적인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성례의 애절한 삶이 당고개 언저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다. 【김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