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나 드러낼 게 없는 평범한 신앙인으로서 선교 체험을 털어 놓는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이 글을 자만심에 빠지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쓸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한다.
현재 서울대교구 수유동본당과 인근 군부대에서 4개의 교리반을 맡아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72살이라는 나이 때문에 힘들 때도 많지만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 의 길을 가르치는 일인 만큼 사명감을 갖고 하고 있다.
처음 교리교사직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한국군 제7사단 종군신부로 계셨던 고 김후성(프란치스코)신부님의 권유로 교리교사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 전장을 오가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이때 전쟁터에서 장병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세례를 받은 장병들이 성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교리교사에 대한 사명을 잃지 않는 동기가 됐다. 제주도 제1훈련소에서 교리를 가르칠 때의 일이다.
“성당에 다니면 내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요?”
암을 앓고 있던 한 환자가 교리를 배우겠다며 찾아왔다. 조건은 병을 낫게 해준다면 이었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를 하느님 앞에 데려다 놓는 일이기 때문에 잠시의 거짓말은 용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환자에게 “성당에 다니면 암을 고칠 수 있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그 환자가 세례를 받고 나면 그때 가서 솔직하게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곧 죽을 거라던 환자가 세례를 받자 마자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때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이후 나는 대전교구 공주지역과 서울대교구 미아3동·수유동 본당 등에서 교리교사 활동을 계속했다. 햇수로 50년이 된다. 지금까지 내게 교리교육을 받은 사람만도 1500여명이 넘는다. 그러나 교리교사의 생활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웠던 점은 직장과 교리교사의 일을 병행하는 것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탓에 본당일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교리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어려움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 의지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버텨왔고 하느님은 내가 남들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셨다.
개인적으로 하느님은 교리교사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내려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교리교사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리교사는 한사람의 생명을 살리거나 죽이는 일에 관여하는 중요한 존재다. 교리교사가 예비신자를 제대로 가르치느냐 가르치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의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리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와 교리에 정통해야 한다. 자기의 지식이어야 남들에게 마음껏 퍼줄 수 있다. 자신이 잘 모르면 소신 없는 교리교육을 하게 되고 그러면 교리를 받는 사람들도 소신 없는 신앙을 갖게 된다. 정확한 교리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뒷전으로 하고 개인적인 신앙체험이나 영적체험을 가르친다면 자칫 뿌리 없는 신자를 양산할 수 있다. 또 교리교사는 성서에도 해박해야 한다. 과거에는 주입식 교리가 주를 이뤘으나 요즘은 성서를 많이 인용한다. 이렇게 해야 예비신자들이 자신의 종교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경험상 교리와 성서에 대한 이해 부족은 바로 신앙심의 약화로 이어진다.
요즘은 세례를 받고 싶어도 수월치가 않다. 특히 남자들은 바쁜 직장생활 때문에 교리반에 결석하기가 일쑤다. 더구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 확신과 의욕을 갖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냥 신앙 하나 가져볼까 라며 성당을 찾는 이들도 상당수다.
그래서 교리교사들은 힘들다. 바쁜 직장생활 틈틈이 교재를 만들며 교육을 준비해야 한다. 1시간 교리를 위해 며칠을 고생하기 일쑤다. 또 일일이 예비신자들의 집에 전화를 걸어 출석을 독려해야 하고 때로는 경조사까지 챙겨야 한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교리교사들의 몸과 마음에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