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5일
본당/공동체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광복절 55돌 맞아 되돌아보는 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역할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1945년 8월15일. 한반도는 일제의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기쁨과 환희에 넘쳐 만세 의 물결로 넘쳐 흘렀다. 그러나 만세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소련과 미국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한반도는 그로부터 55년간 말로 다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교회는 세상 구원이라는 본질적 사명을 위해 사회 정의와 평화 자유를 실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통일과 민족 화해 일치는 한국천주교회의 중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똑같은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한국교회는 지난 55년간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해방 직후 남북 사회에는 분단 국가 수립 이라는 공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력과 남북 협상을 통해 민족 통일을 추구하는 세력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이들이 전자에 속하고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 세력은 후자에 해당된다.
이때 남한 교회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론 에 찬성을 표시했고 나아가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적극 참여하고 단독 정부 수립의 불가피성을 신자들에게 강조하기도 했다. 교회의 이같은 태도는 종교를 아편 으로 규정하는 공산주의를 인정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남한에서라도 종교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데 협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6·25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는 전후 복구와 경제 개발을 통한 가난 탈출 이었다. 사회 전체가 무엇보다 먼저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쳤고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제 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면서 이들 안에 복음을 전하는 데 전력 투구했다. 또 동·서 냉전 체제가 고착화되면서 교회도 반공 또는 멸공 이데올로기의 노선을 그대로 이어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던 해인 1965년 한국교회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과 기도문을 제정 북한에 대한 교회 차원에서의 공식적인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기도문은 냉전 이데올로기 체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고 또 민족 전체보다는 신앙의 자유를 잃은 북한 교회 만을 위한 것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이런 태도는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후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당시 교회 언론은 7·4 남북 공동성명과 같은 중대사에 대해 주교단의 공식 입장 천명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면서 교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남북 관계 변화에 대응하는 명확한 사목적 입장을 표명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7·4 남북 공동 선언의 기본 정신은 유신 체제가 들어서면서 국내의 반 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인해 빛을 잃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에도 전쟁 이후 견지해오던 정복론이나 흡수 통일의 입장에서 벗어나 평화통일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해주는 계기가 됐다.

그 결과 1982년 한국교회는 설립 20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북한 선교부를 신설하고 85년에는 이를 주교회의 산하 위원회로 승격하면서 분단 현실 극복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는 등 통일 사목을 향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또 1984년에 한국인 사제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사목중이던 고종욱 신부가 북한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지학순 주교(85년) 장익 신부를 중심으로 한 바티칸 대표단(87년) 문규현 신부(89년) 등의 방북이 잇따라 성사되었다. 북한은 88년 조선천주교인협회를 결성했고 그해 10월에는 평양 장충성당을 건립했다.

80년대 후반 국내 관심의 초점이 민주화에서 통일로 옮겨가면서 교회도 기존의 북한 선교 에서 통일 사목 또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 라는 차원으로 북한에 대한 관심의 폭을 넓혀가게 된다. 그리하여 92년에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로 바뀌게 된다.

이어 95년 서울대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발족하고 때맞춰 큰 홍수 피해를 입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 시작되면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노력도 더욱 활기를 띠어갔다. 민화위는 조선천주교인협회와의 공식적인 만남(95년 10월 뉴욕)을 시작으로 최창무 주교의 사목적 방북(98년)에 이르기까지 대북 접촉을 통해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동시에 식량난을 겪는 북녘 동포들을 위한 구호 및 지원을 대폭 확대해 갔으며 80년대 후반 교회의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해 각 교구와 수도회들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주교회의 차원에서는 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를 설립하고(97년)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의 명칭을 민족화해위원회로 바꾼 데 이어(99년) 각 교구들이 북한 각 지역과 자매결연을 맺기로 하는 등 민족화해를 위한 활동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분단 50년 동안 견지해오던 단순한 북한 선교 차원에서 벗어나 민족 화해와 일치 의 개념을 바탕으로 남북 상호 협력과 이해를 향한 물꼬를 트게 됐다.
해방 이후 반공과 멸공 에서부터 민족 화해와 일치 라는 대전환을 이루며 갈라진 형제들과의 재회를 꿈꾸어 온 한국교회가 이제는 통일시대를 대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조광(고려대 한국사학과)교수는 “통일 시대를 대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물질적 지원과 사회복지 활동을 통한 단순한 선교가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보편적 구원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사목”이라면서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우선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을 토착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북한 동포들과 진정한 민족적 일치를 이루면서 그들이 참으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변진흥(인천가톨릭대 북한학과)교수는 “한국교회는 통일 후에 야기될 수밖에 없는 갈등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화해와 일치 라는 복음정신에 입각해 한민족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교구와 본당 일선에서 우선 통일시대에 대비한 사목구조와 시스템 개발을 위해 진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박주병 기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00-08-13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9. 5

에페 5장 20절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