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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희년과 6.25 50돌 계기로 본 북한교회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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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인 개최로 민족화해와 통일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교회 안에서도 북한교회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대희년에 맞이하는 6·25 50주년을 계기로 북한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편집자〉
1945년 해방 당시 북한지역은 연길·평양·함흥·서울·춘천 5개 교구와 1개 면속구(덕원 자치수도원구)가 관할하고 있었다.

북간도 지역을 관할하던 연길교구는 1946년 4월11일 중국 봉천교구로 넘어가 한국교회 관할지역에서 제외되기 전까지 성베네딕도 수도회가 맡아 연간 2000명이 넘는 영세자를 배출하는 활발한 선교활동을 폈다. 본당 47개에 신자수도 1만7000여명에 달했다.
평안남북도를 관할하던 평양교구는 본당 19개 공소 106개 교육기관 22개 복지기관 17개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신자수는 2만6400여명을 차지했다. 교구의 기초를 닦아놓았던 메리놀 외방전교회 미국인 선교사들이 1942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후 1943년 한국인 홍용호 주교가 노기남 주교에 이어 두번째 한국인 주교로 평양교구장에 임명됐다.
함경남북도를 관할하던 함흥교구와 덕원면속구는 성베네딕도 수도회가 맡아 12개 본당과 34개의 공소를 운영하고 교육과 복지활동을 벌였으며 신자 수는 1만명이 조금 넘었다.(면속구란 교구에 속하지 않고 교황청에 직속되어 교구처럼 관할지역을 두고 자치권을 행사하는 자치구를 말하는 것으로 보통 대수도원장이 교구장의 권한을 행사한다)
서울대교구는 북한지역에서 경기도 일부 지역과 황해도 지역의 18개 본당과 145개의 공소 24개 교육기관 3개 복지기관을 맡고 있었으며 춘천교구는 강원도의 2개 본당을 관할하고 있었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에는 3명의 주교와 80여명의 성직자 180여명의 수도자들이 이처럼 본당 사목 뿐만 아니라 유치원과 학교 시약소와 병원 양로원과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교육 의료 복지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44년 한국교회 교세통계에 따르면 당시 북한지역 신자수는 모두 5만7008여명으로 한국 교회 전체 신자수 17만9114명의 31.8를 차지했다.

그러나 해방 후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북한에서 공산화의 첫 시도로 1946년 토지개혁이 시행되자 교회가 운영하던 시설들이 몰수되기 시작 교회 운영의 기초가 무너져갔다. 1948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교회는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1949년 4월 한국 주교들이 남한의 분단 정권을 지지하고 강력한 반공적 메시지를 담은 연합교서를 발표한 직후 북한에서는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뤄졌다.

1949년 5월14일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가 납치됐으며 많은 성직자들이 체포되거나 행방불명됐고 1949년 12월과 이듬해 5월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원과 원산 포교 성베네딕도 수녀원이 몰수됐다.

북한당국은 또 1949년 덕원면속구 신부 수사들을 연행하기 시작하더니 5월7일 함흥교구장인 성 베네딕도 덕원대수도원장 신 보니파시오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와 독일인 수도자들을 강제연행하고 교회재산을 전부 몰수했다.
평양교구 주교좌 관후리성당은 새 성당 준공을 눈앞에 두고 1949년 12월 강제 몰수당했다. 평양시 관후리 251번지에 위치한 관후리 주교좌 본당은 학교와 유치원 양로원 무료숙박소 등을 운영하면서 1946년 새 성당 기초공사에 착수했다. 새 성당 건립공사에는 평양시내 뿐만 아니라 신의주에서도 신자들이 찾아와 노력 봉사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에 감동한 비신자의 일화도 남아있다.
1948년 1월1일 아침에 낯선 사람이 성당을 찾아와 당시 벽돌 5000장을 살수 있는 돈 5000원을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신자는 아니지만 이 성당을 짓는데 노력하는 신자들의 열성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땀과 피의 절정인 이 대성당이 우리 민족에게 행복과 위로를 주리라고 확신합니다. 부끄럽지만 약소한 이 돈을 보태어 벽돌 한 장이라도 올려주십시오.”
그러나 이 비신자의 아름다운 정성과 뜻은 이뤄지지 못했고 그 자리에는 현재 소년궁전이 들어서 있다.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 가운데 가장 먼저 몰수된 곳은 평안북도 비현성심학교였다. 비현본당이 운영하던 이 학교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학비와 운영비를 모두 본당이 부담했으나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결국 폐쇄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북한교회에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사제가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교회 재산도 모두 몰수됐다. 사제가 없는 북한 교회에서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하로 숨어들어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갔지만 한국동란 이후도 북한 당국의 종교탄압은 그치지 않고 계속됐다.

이후 40년 가까이 외부와 단절돼 있던 북한교회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8년 6월 조선천주교인협회(1999년 1월 조선카톨릭협회로 명칭 변경)가 결성되면서부터였다. 그 해 10월에는 평양에 장충성당이 세워졌으며 이때 바티칸 특사로 장익(현 춘천교구장 주교)신부와 정의철(가톨릭대 교수)신부가 방북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이후 90년대 들어 북한을 방문하는 해외교포 사제나 외국 사제들을 통해 장충성당의 신자들의 생활이 외부에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고 북한 교회에서 만든 교리서와 기도서도 국내에 입수됐다.

95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발족되면서 북한교회와의 접촉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특히 지난 1998년에는 당시 민화위 위원장 최창무(현 광주대교구 부교구장 대주교)주교가 고위성직자로서는 최초의 사목적 방북을 하기도 했다.

현재 북한에는 사제는 없고 장충성당 한 곳과 북한 전지역에 3000명의 신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비록 북한당국의 정책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북한에 가톨릭 교회가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교회가 남북이 통일되는 날 북한교회 재건의 토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에서 분단 이전의 북한교회에 대한 관심못지 않게 지금 북한교회에 관심을 갖고 형제적 사랑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이연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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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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