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과 40년 전만 해도 성당에 가면 제대가 앞 벽에 붙어 있었고 미사 때 사
제는 신자들을 뒤에 두고 서서 제사를 봉헌했으며 그 언어 또한 한국말이 아니
라 라틴어였다. 성가도 세계 음악사에서 유명한 작곡가들이 만든 것이 대부분이
어서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만큼 배우기 어렵고 특별히 좋은 목소리를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따라 부르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신자들은 미사 때 하릴없이 앉
아 있던지 아예 눈을 감고 나름대로 묵상을 하거나 묵주의 기도를 바치고 있다
가 거양성체 때가 되어 복사가 종을 치면 정신을 번쩍 차리고 미사가 이 단계
에 와 있음을 확인하곤 하였다. 신자들은 미사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구경꾼처
럼 묵묵히 앉아 있다가 때가 되면 헌금과 영성체를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미사는 사제 혼자서만 하는 일이 되었기에 사제의 영역인 제단과
신자석 사이에는 영성체 난간이라는 일종의 칸막이가 설치되어 이 두 영역 사
이의 엄격한 구분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이 간단한 사실만을 생각해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가 얼마나 크
게 변화되었는지를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제대는 이제 벽에 붙어있지 않
고 제단에서도 신자석을 향해 앞으로 훨씬 나온 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사제 역
시 신자들을 바라보고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전례 언어는 회중이 바로 알아
들을 수 있도록 각 나라 혹은 지방의 말로 바뀌었고 제단과 신자석 사이에 설
치되었던 영성체 난간도 철거되었다. 그리고 주례사제가 모든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도록 제단에서도 약간 높이 주례석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성가 역시 목소리
좋은 몇 사람만이 열심히 연습해서 부르는 어려운 곡 대신 모든 사람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곡으로 대치되었다. “노래로 하면 기도가 두 배로 된다”는 말이
있거니와 이처럼 훌륭한 기도인 성가를 몇 사람이 독점함으로써 다른 참례자들
이 기도드릴 수 있는 기회를 오히려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연습
을 거의 하지 않고서도 안심하고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성가를 선도하는 것으로
성가대는 그 역할이 바뀌었다.
이외에도 미사해설 성서봉독 헌금봉사 제물봉헌 보편지향기도 오시는 분
들의 영접과 안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신자들은 미사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
게 되었다. 그리고 미사를 좀더 의미있게 하기 위해서 때와 장소에 따라 창의력
을 가지고 추가하거나 바꿀 수 있는 부분을 여기 저기 허용하고 있다. 참회 예
절 봉헌 예절 신자들의 기도 영성체 후의 감사 표현 등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
이다.
전례헌장의 목표와 기본취지
“전례는 교회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전례헌장 제10항). 그러므로 “‘회중 전체의 완전하고 능동적인 참여’는 거
룩한 전례의 개혁과 촉진에 있어서 ‘모든 힘을 다해 추구해야 할 목표’이
다”(제14항).
지금 한국교회 전례의 실상을 두고 전례헌장이 천명하고 있는 이 두가지 기
준에 따라 살펴보자면 어떤 평가가 나올 것인가?
먼저 전례가 “교회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거기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실제로 삶의 힘”을 충분히 공급해 주고 있는가? 성 레오 교황의 표현대로 전
례가 “주 그리스도의 삶과 그분께서 하시던 일을 오늘에 되살리고 연장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전례를 통해서 정말로 그분을 만나는가? 안팎으로 묶인
사람들이 해방을 체험하고 눈먼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보며 삶과 양심의 무
게를 이기지 못해 허덕이던 사람들이 시원한 자유를 체험하는가? 그렇게 해서
사회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메마르고 황폐했던 사람들이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
던 기쁨을 느끼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해 희년의 순수하고 뿌듯한 희열
을 발견하는가? 우연히 우물가에 나갔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전혀 새로운 삶과
세상을 찾아내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을 얻어 마신 사마리아 여인의 체험은
전례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가?
다음으로 “회중 전체의 완전하고 능동적인 참여”라는 전례헌장의 목표는
잘 실현되고 있는가? 공의회는 전례헌장을 통해서 16번씩이나 신자들이 전례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방식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이 입장은 그대로 전
례헌장의 기본 취지가 되어 교회는 이를 위해 “모든 힘을 다 해야한다”고 강
조하고 있는데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가?
철저한 교육·준비과정 필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고 만일 우리의
전례 현실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이를 시간과 공간의 두 가지 기본 축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공의회가 지난 지 한세대가 되었는데도 마치 그 이
전 시대에 사는 것처럼 거기에서 채택된 개혁 노선이 실제로 이행되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시간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례를 ‘오늘’
에 맞게 바꿔야 할 과제 곧 ‘지금의 현실에 맞추는 일’(한때 많이 유행하던
이탈리아어 그대로를 빌리자면 ‘아조르나멘토’) 곧 ‘현대화’의 과제가 된
다. 그리고 성당의 분위기에서부터 성가 기도문 사제의 복장 등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전례에서 외국 냄새가 너무 많이 나고 늘 낯설게 느껴지는 데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공간과 거기 담겨 있는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므로 가능한
한 당연히 우리의 자연스런 정서와 ‘전통 문화’에 맞추는 노력으로 풀어가야
한다. ‘토착화’가 문제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이 둘 중 어느 쪽인가? 물론 양쪽 모두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공의회에서 전례헌장을 반포한 지 거의 40년이 되는 지금까지 ‘토
착화’뿐 아니라 ‘현대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전례 현
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많은 본당에서 미사중에 신자들은 적극
적으로 하는 일이란 별로 없이 앉아 있다가 나가는 것이 보통이고 성가는 여전
히 성가대의 독점물로 남아 있다. 주례석이 특별히 설치되지 않은 곳이 대부분
이며 성서봉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외에도 신자들이 적극적으
로 할 수 있는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고 있다.
왜 그런가? 그 모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교육과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점에서 우리 교회는 크게 분발해야 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예를 들면 성서봉독은 봉독자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상태에 따라 그
효과가 크게 좌우된다. 신념을 가지고 뱃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천천
히 정확하게 봉독되는 성서는 그 자체가 하느님 말씀의 훌륭한 선포행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국어교육은 그동안 지나치게 글 중심이었고 살아있는 말을
통해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는 쪽의 훈련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 가운데에서 성서봉독을 참으로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
물며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직책을 맡았다 하여 성서봉독을 차례로 시킨다면
그 임무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성가는 회중 전체가 전례에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