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가 20일로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을 맞는다. 반백의 세월을 오로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몸바쳐 온 윤 대주교를 8일 광주대교구청 2층 교구장 집무실에서 만났다.
깔끔하게 정돈된 집무실에서 교구 사제평생교육원 개강을 앞두고 강의 원고를 집필하고 있던 윤 대주교는 자신의 근황에 대해 “몸도 건강하고 잘 지내고 있다”면서 “최창무 대주교님이 오신 후에는 본당 사목방문이나 교육 행사 등을 모두 나눠서 하기 때문에 힘은 덜 들지만 분주하게 지내는 것은 예전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서품 50주년을 맞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크게 잘못한 것 없이 50년을 살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서 “잘 했다고 생각하면 잘못한 것도 생각나게 된다”며 미소를 지었다. 또 “평범하게 그러나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평범하게’라는 말과 달리 윤 대주교의 사제생활 50년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가장 평범한 사제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본당사목은 1950년 사제서품 직후 서울 명동본당에서의 4개월간의 보좌생활이 전부였고 대부분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숨가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윤 대주교 자신도 본당생활을 많이 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고 밝혔다.
1924년 평남 진남포 용정리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윤 대주교는 1937년 덕원신학교에 입학 사제 성소의 길을 밟았다. 1949년 덕원신학교가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자 이듬해 1월 서울로 내려와 3월 사제로 서품됐다.
명동본당 보좌로 부임해 사제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윤 대주교는 6·25 전쟁으로 4개월간의 평범한 보좌생활을 접었고 포로수용소의 종군신부 로마유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를 거쳐 1963년 수원교구장 주교로 서임됐다. 이후 1967년 서울대교구장 서리 겸임 1973년 광주대교구장에 임명돼 그해 11월30일 착좌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광주에서만 지냈다.
50년간의 사제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때가 언제냐고 묻자 윤 대주교는 6·25 전쟁 당시를 떠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납치되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신부들은 공산당이 상당히 주목하는 대상이었고 더구나 이북 출신인 나는 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명동본당 신자 한명이 공산당 정치보위부에서 윤 신부의 체포령이 내려질 것이라고 알려 주며 피란처를 주선해 주었지만 윤 대주교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인간적으로 정말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이건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하느님이 계획하신 일이라면 그대로 따라야겠다고 생각했지요.”
하느님의 뜻이었는지 윤 대주교는 정치보위부의 조사를 무사히 마치고 경기도 하남의 구산공소에서 지내다 1·4후퇴 이후에 부산의 유엔 포로수용소에서 종군사제로 사목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처했던 위험한 상황이 그 시절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시기가 바로 내 생애에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등 신부로서 활동했던 유일한 시기였기에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다시 직무를 맡는다면 주교직과 사제직 중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물었다.
“하느님께서 사제와 주교 중 어느 것을 취하겠냐고 물어보시면 주교가 되는 것은 좀 두렵고 아마도 사제를 택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정해주신 일이라고 봅니다. 괴로운 길일 수도 있고 십자가가 많은 길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이 주신 길만이 가장 보람있고 복된 길이고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윤 대주교는 유신 말기부터 5 6 공화국에 이르는 암울했던 시기에 정의평화위원회 담당 주교로서 특별한 몫을 담당했다. 특히 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으로서 민중과 함께 아파하고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왔다. 더욱이 광주대교구장으로서의 28년의 세월은 윤 대주교로 하여금 광주를 제2의 고향이라고 여길 정도로 광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게 했다.
윤 대주교는 80년 광주의 비극과 관련 “그 일은 광주 시민만의 일이 아닌 전민족의 일이었고 교회가 고통받는 광주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회고하는 윤 대주교는 “그 고통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됐지만 교회가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알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모두의 노력에 함께했다는 사실은 정말 뜻깊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재임기간 동안 교회의 핵심 사명인 선교에 역점을 두면서 이를 위해 사제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윤 대주교는 “특히 지난 10년 동안 100여명의 사제가 나왔다”고 뿌듯해 했다. 73년 착좌시 28명이던 교구 사제는 현재 179명으로 늘었다. 또 6만여명에 불과하던 신자수도 99년말 현재 27만3552명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윤 대주교는 “신자들의 의식 변화가 이런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며 공을 신자들에게 돌렸다.
윤 대주교는 노사제로서 후배사제들에게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사목에 임해달라고 당부했다.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종사하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에 겸손한 마음으로 사목해 달라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지내며 함께 복음선교의 일에 매진했던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리스도 안에 하나되어 친교의 생활을 깊이 있게 해 나가고 열린 교회 사회와 함께하는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한편 광주대교구는 20일 오전 11시 광주 염주동성당에서 윤 대주교의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 축하 미사를 봉헌하고 이어 광주가톨릭대 부설 평생교육원에서 축하연을 갖는다. 또 윤 대주교의 사제생활 50년을 되돌아보는 기념 사진첩을 마련했다. 【임동근 기자】
약력 ▲1924년 평남 진남포 출생 ▲1937년 덕원신학교 입학 ▲1950년 3월 사제서품 명동본당 보좌 ▲1956년 로마유학 ▲1960년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 취득 후 귀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 ▲1963년 10월7일 수원교구장 임명 10월20일 서품 ▲1967년 4월 서울대교구장 서리 겸임 ▲1973년 10월25일 광주대교구장 임명 11월30일 착좌 ▲74년 3월∼76년 3월 한국 주교회의 의장 ▲74년∼현재 광주가톨릭대 이사장 ▲80년 11월∼84년 11월 한국 천주교 선교 200주년 기념 주교위원회 위원장 ▲85년 4월 서강대 명예문학박사학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