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조선천주교회는 정교분리정책을 고수하면서 신자들의 저항운동을 금했다. 그러나 교회의 이런 방침에도 불구하고 일부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1절을 맞아 교회사학자 윤선자(도미니카·전남대 강사)씨가 ‘3·1운동기 천주교회의 동향’(전남사학 11 97년 12월호)을 주제로 발표한 내용을 중심으로 3·1운동 당시 평신도들의 활동을 소개한다. 또 외국인 성직자로서 3·1운동 당시 조선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 파리외방전교회의 공안국 신부의 활동을 알아본다. &27849 편집자 &27850
3·1운동이 시작됐을 때 조선천주교회를 관리하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프랑스인 주교들은 또다른 박해를 피하고 조선에서의 선교권을 보장받기 위해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우며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금했다.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는 조선신자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운동에 가담하면 대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며 적극적으로 막았다. 파리외방전교회와 베네딕도회 등의 선교사들도 같은 입장을 취해 신자들의 운동참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으로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던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와 서울 용산예수성심신학교 신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경기도 안성본당의 공안국 신부는 군중들에게 만세운동 방법을 가르쳐주고 일본군에 쫓기는 군중을 보호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 신자들에게 신앙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였다. 교회는 신자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금했지만 독립운동참여가 조선인으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던 신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지역별로 볼 때 경기도에서는 신자 김교영(金敎永)이 황주군 동부면 망월리의 신자 9명과 함께 동부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고 용인에서는 신자 한영규(韓榮圭)와 김운식(金云植) 등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 수원에서는 이순모(李淳模)가 군중 200여명의 선두에서 투석과 몽둥이를 들고 장단면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사무소와 공문서를 파기했다. 이어 군중이 2000여명으로 증가하자 우정면사무소로 달려가 유리창과 집기류를 부수는 등 격렬히 싸웠다. 이날 만세운동은 천주교 신자가 이끈 만세운동 중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경기도 고양에서는 신자들이 앞장서 군내 면장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요구했고 강화에서는 군중 1만여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다 신자 3명이 체포됐으며 인천에서도 신자 2명이 만세운동과 관련해 체포됐다.
황해도지역에서는 신자 김경두(金慶斗)가 이끈 군중 200여명이 신천군 용문면 사창리 헌병분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됐으며 신자 학생 홍석종(洪錫宗)은 은율읍의 만세운동계획에 참여했지만 사전에 발각돼 실현하지는 못했다.
특히 김경두는 “자기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조선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조선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므로 죄가 안된다”고 주장 신자들이 교회의 방침은 알고 있었지만 독립을 위한 노력은 당연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경북지역에서는 천주교 학교인 대구 해성학교 교사 김하정(金夏鼎)과 신자 김찬수(金燦洙)와의 매개로 만세운동이 이뤄졌다. 김하정은 서울과 연락해 독립선언서와 유인물을 대구로 가져와 해성학교 주인인 김찬수의 집에서 배포했으며 이들을 통해 일어난 대구의 만세운동에는 1000여명의 군중이 참여했다.
이같이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구속된 신자는 총 53명으로 집계되고 있으나 체포되지 않았거나 체포됐더라도 풀려난 사람들은 상당수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3·1운동에 참여한 천주교 신자들의 비율은 개신교 천도교에 비해 낮았다. 그러나 당시 만세운동을 단죄하는 외국인 주교들이 관리한 조선천주교회의 일원인 신앙선조들이 민족의식을 잃지 않고 조국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임동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