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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격행동 자제 권고...성당을 피란처 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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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저희가 어떤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하면 좋겠습니까?”
1919년 3월1일 경기도 안성성당 사제관.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퍼질 무렵 안성지역 지도자들이 서양신부를 찾아와 자문을 구했다.

“낮에는 국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것이 좋겠지만 밤에는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세요. 그리고 행렬을 하는 동안 일본인을 치거나 건물을 부수지 마세요. 당신들은 맨주먹이니 일본인이 한 명이라도 다치면 큰 일 납니다.”
안성본당 주임 공안국(안토니오·파리외방전교회) 신부는 사람들이 군중심리에 휩쓸려 과격한 행동을 할까봐 염려하며 이렇게 충고했다.
사람들은 공 신부의 뜻에 따라 질서를 지키며 행동했다. 그러나 일본군과 부닥치자 만세를 부르던 행렬은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군중들은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성당 마당이 한순간 피란처로 변해버렸다.
공 신부는 재빨리 프랑스 국기를 높이 걸어 ‘치외법권’ 지역임을 드러냈다. 뒤쫓아오던 일본군이 성당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성성당이 ‘피란처’로 바뀐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후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으로 안성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시끄러웠다. 의병을 추격하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등 폭행을 일삼던 잔악한 일본군이 안성읍내에 도착하자 민중들은 벌벌 떨고 걱정하다가 성당으로 몰려갔다. 공 신부는 서양인을 두려워하던 일본군의 손에서 민중들을 보호해 주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서울에서 일본인들의 잔악한 ‘행동’이 알려지면서 각 지방에서 분노와 폭동이 일어났다. 군중들은 일본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집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안성지역민들도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을 그냥 놔둘 수 없다며 흥분했다. 지역 대표들은 행동 개시에 앞서 공 신부를 찾아가 상의했다.
공 신부는 서울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 지역 일본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지역 대표들에게 이해시켜 나갔다. 공 신부의 얘기에 사람들은 조금씩 동조하며 누그러져 결국 위험에 빠졌던 일본인 상인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일본인들의 보복이 여러 지역에서 자행됐으나 안성지역은 무사했다. 사람들은 공 신부의 중재와 권고 덕에 목숨을 건졌다며 감사를 표했다.
1900년 안성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낯선 이방인으로 환영받지 못했던 공 신부는 어느새 지역민이 의지하는 ‘안성 유지’로 변해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기미년에 큰 흉년이 들어 이듬해 봄에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많았다. 공 신부는 모국 프랑스에 호소해 모은 돈으로 기아민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1875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공 신부는 1900년 6월24일 사제서품을 받고 그 해 10월19일 안성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다. 그가 고향에서 가져온 포도를 성당 마당에 심은 것이 오늘날 유명한 ‘안성 포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는 또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나눠주면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안법학교를 세워 의식교육에도 신경을 썼다.
안성에서 32년간 사목하면서 이렇게 ‘선교사’로서의 삶에 충실했던 공 신부는 6·25때 북한으로 끌려가 중강진에서 선종했다. 안성본당(주임·이상돈 신부)은 본당 설정 100주년을 맞아 지난해부터 초대주임 공 신부의 유해송환운동을 펴고 있고 안성시는 포도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연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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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0-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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