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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주교단 대희년 특별진단] 새 천년기 한국 천주교회의 도전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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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의미

일반 신자들에게 영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당황해할 것이다. 설령 정의를 내린다 하더라도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사실 학자들간에도 영성의 정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이는 곧 영성이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조던 오먼은 “영성이란 인간의 행위가 거기서 유발되는 그 어떤 몸가짐 혹은 정신으로서 구체화된 윤리적 혹은 종교적인 가치를 총칭하는 것이며 한마디로 윤리나 종교에 대한 인식방식과 그에 따른 행동양식을 뜻한다”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가톨릭 영성은 하느님께 대한 가톨릭적 인식방식과 그 인식에서 유래하는 행동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가톨릭에서는 성모님을 천주의 모친으로 동정녀로 인식한다. 그래서 상경지례를 드린다. 그러기에 성모님을 공경하지 않고 모독적인 말을 한다든지 성모님이 동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가톨릭 영성을 갖지 못한 사람이다.

학자 다니엘은 영성을 하느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라고 정의했다. 즉 어떤 사람의 영성이 깊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과의 관계와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의미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영성은 마치 산을 등산하는 데 필요한 안내서와 같은 것이라고 더 쉽게 설명했다. 즉 등산하는 이유는 산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길이 있고 각각의 등산로마다 필요한 장비가 요구된다. 그러나 그 모든 길은 정상을 가는 데 있다. 즉 주님을 정상이라고 생각했을 때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길이 있으며 각각의 길마다 준비물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을 만나기 위한 여러 가지의 길 안내서 등 모든 것들을 통틀어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정상을 오르는 데 있어서 어느 길을 가든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신발을 신든 자유다. 좋고 나쁜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프란치스코의 길(영성)을 택하든 가르멜의 길(영성)을 가든 이냐시오의 길(영성)을 가든 어떤 것이 더 좋고 더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맞는 영성의 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필로테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교가 샬트르 수도회의 수사처럼 관상적 독수자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가정을 가진 자들이 카푸친회 수사들처럼 금전을 소홀히 여기거나 직공이 수도자처럼 종일 성당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든가 수사가 주교처럼 언제나 타인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닌다면 이런 신심은 참 우습고 질서를 뒤집는 또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는 10년간의 신학교생활이 요구된다. 그 10년 동안 어떻게 하면 주님께 빨리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를 열심히 연구하고 수덕에 정진하며 기도한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영성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전문적인 지식과 영성 증진의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영성의 길을 곧바로 가야 한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성서에 맛들이며 영적인 생활에 정진해야 한다. 또 사목직과 예언직 왕직에 충실해야 한다.
수도자는 수도자 나름대로의 영성의 길이 있다. 청빈과 정결 순명의 서원을 하고 살아간다. 그들은 이 세상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며 보다 큰 가치 즉 영원한 가치가 있음을 생활로 증거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평신도는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을 증거하며 살아가야 한다. 가정을 꾸미고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수고하며 살아가야 하므로 기도할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다. 육체적인 노동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로 집에 돌아와 묵주의 기도도 하고 성서도 읽고 묵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의무로 여길 수도 없다. 또 그래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다음날 또다시 삶의 현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잠을 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간단한 기도가 약이다. 그것이 노동하는 평신도의 영성생활이다.
문제는 여기서 제기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야할 길 자신이 지켜야할 자리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따라야 하는 영성이 있는 것이다. 사제나 수도자가 빈둥빈둥 놀면서 기도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영성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들은 제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영성이 아니다.
자식이 여러명 있고 시부모를 모시고 있는 평신도가 있다고 하자. 자신의 일은 게을리하면서 기도하기 위해 몇시간씩 할애하고 여러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다면 자연히 그 가정은 엉망이 될 것이다. 이 또한 자신의 자리를 이탈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때로 자신의 자리를 잊고 엉뚱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어떤 평신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와 물질적인 여유 가족 문제가 없을 때 전적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영성에 맞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 나무에겐 그 종류에 맞는 열매를 맺게 해 주셨다. 배나무에는 배만 열린다. 배나무에 감이 열릴 수는 없다. 인간도 각자 다른 영성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사제는 사제로서 맺을 열매가 있고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맺을 열매가 있다. 평신도 중에도 정말 기도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밤낮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아주 가난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 “당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만 하면서 일어나고 자도 훌륭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많은 사람은 여러 가지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함으로써 자신의 영성을 키워야 한다.
그러므로 영성은 각자가 모두 다른 상황 하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관계를 갖느냐가 문제이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서 어떤 이는 묵주의 기도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성서를 어떤 이는 묵상기도를 어떤 이는 성가로 주님을 찬양함으로써 영성을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그릇에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남의 구두가 좋아도 내발에 맞아야 한다. 예를 들면 가르멜 프란치스코 아우구스티노 베네딕토 등등의 영성이 좋다 하더라도 나에게 맞는 것이 중요하다. 목표는 주님을 만나는 데 있는 것이다. 어떤 영성이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치우치지 않는 영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는 영성학자나 영성가들이 영성을 단지 영적인 것으로만 이해했기에 기도 고행 참회 수덕 은총 등에 관심을 두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인간의 삶에 관련된 봉사 해방 사회정의 등에는 무관심한 것이 보통이었다. 영성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것에서 멀리 떠나 수도자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영성은 전문가인 성직자나 수도자에게나 의미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영성의 의미를 더 넓게 인식하게끔 했다. 즉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구별없이 자신이 처한 처지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데 관심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00-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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