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굽이굽이 휘어진 좁은 골목을 따라 높다랗게 뻗은 계단을 오르면 하늘과 맞
닿은 동네를 만난다. 곳곳에 금이 간 담벼락.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길 양쪽
으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하늘을 받든다는 이름의 봉천동 달이 가깝게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달동네’.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인 봉천3동 주민들은 2∼3월께 강제철거가 시
작되면 정들었던 이웃들과 헤어져야 한다. 이미 군데군데 주인떠난 빈 가옥들이
철거됐다. 남아있는 450여 가구의 세입자들은 대부분 이사할 방을 구할 돈조차
변변히 없는 사람들이다.
손에 쥔 돈도 없이 오랫동안 살던 동네에서 밀려나야 하는 주민들은 새해가
다가왔지만 모이기만 하면 철거얘기를 하다가 밤을 샌다. 방 보증금 300∼400만
원을 갖고 어디서 집을 구할지 막막해서다. 주민 대부분이 단순 일용직 종사자
이고 실직자도 많다. 혼자 사는 무의탁 노인들도 50명 가까이 된다.
그렇다고 생활고와 강제철거 문제로 모두가 우울하게 새해를 맞는 것만은
아니다. 주민들은 요즘 ‘봉천3동 세입자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이주할 경제적
능력이 안되는 세입자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세입자 대책위원장 김규영(42·아브라함)씨는 “공공임대아파트 입주자격이
있어도 1000만원이 넘는 임대보증금을 마련할 수 없는 가정이나 무의탁 노인들
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해에는 ‘가이주 단지’가 마련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봉천3동선교본당 ‘하늘자리 공동체’ 임용환 주임신부와 신자들의 대희년
새해 희망은 이보다 폭이 넓다. 세입자들이 임시로 거주할 수 있는 조립식 임시
이주단지라도 마련되면 신자들 뿐만아니라 지역주민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동네
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소득 주민들의 실업대책활동에 동참하고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생산공동체를 지원하는 등 지역문제의 해결책을
함께 모색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설립된 ‘하늘자리 김치공동체’ 사업도 그 중 하나. 배추김치
총각김치 갓김치 등 각종 김치를 주문·판매하는 ‘하늘자리 김치공동체(02·
875―9632 019―299―9632)’는 올해 김치 주문이 더욱 늘고 사업이 활성화되
어 많은 주민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바
람이다.
이곳에서 작은 미장원을 운영하며 3남매를 키우는 조은희(38·엘리사벳)씨의
새해 소망은 조금은 소박하다.
“잘사는 사람을 부러워하지는 않아요. 밥 세 끼 먹고 죽을 때 빈손으로 가
는 것은 부자나 우리나 똑같잖아요. 그저 새해에는 IMF가 빨리 끝나서 생활이
조금 나아지고 아이들이 지금처럼 모두 건강하기만 하면 좋겠어요.”
【서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