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김대건과 최양업 등을 신학생으로 선발하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는 등 조선교회 재건에 전력을 다해왔던 정하상(바오로)이 1839년 9월22일 서소문 밖에서 4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정하상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쓰러질 위기에 처해있던 조선교회의 재건을 위해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고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했던 인물로 지난 7월11일 모친 유소사(체칠리아) 누이동생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서울에서 체포됐다.
정하상은 심문과정 중에 “네가 조선풍속을 따르지 않고 외국의 도를 행하여 사람을 가르쳐 혼탁하게 하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 형관의 질문에 “외국의 좋은 물건은 취해 쓰고 천주성교는 외국의 도라고해서 옳은 일을 배반하겠냐”고 반문 형관을 당혹스럽게 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기 직전 천주교회 호교론서 ‘상재상서(上宰上書)’를 저술 박해를 가하고 있는 조선정부에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 1795년 ‘명도회’ 회장이었던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정하상은 부친과 친형 철상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자 숙부 정약용의 경기도 양근부 마재촌 집에서 성장했다. 20세에 단신 상경한 그는 1816년부터 1839년 기해박해까지 20여년을 조선 천주교회의 부흥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서양선교사와 함께 거주하며 비서역할을 하는 등 성직자를 보좌하고 자문하는 평신도의 직무에 충실했다.
또 현석문(가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의 도움을 받아 중국까지 왕복 5000리(2000km)를 무려 9차례나 왕복하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통해 조선교회의 등불을 밝히는 데 전력을 기울여왔다. 이밖에 조선인 사제의 양성을 위해 소년 김대건과 최양업 최 프란치스코의 집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 신부와 함께 찾아가 아들을 사제로 봉헌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천주교인들은 그를 ‘장상’처럼 여기며 존경했고 수많은 이들이 정하상의 도움으로 하느님을 믿게 됐다.
현재 옥에서 심문을 받고 있는 정하상의 79세 노모 유소사와 누이동생 정정혜는 가혹한 고문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도 곧 참수형에 처해질 것으로 알려졌다.【이주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