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1885년
수많은 교인들을 순교로 몰아간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1839년 3월(헌종 5년)에 시작된 기해박해는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서라는 명분 외에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권 쟁탈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깔려있었다.
이 박해에서 조선교구 제2대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 사스탕 신부 그리고 유진길 정하상 등 110여명이 순교했다. 그러나 박해가 심하고 광범위했던 만큼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며 교회세력도 가난한 서민층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병오박해(1846년·헌종 12년)는 이 해 6월 프랑스 함대가 찾아와 프랑스인 성직자를 처형한 책임을 추궁하자 이에 반발한 조정에 의해 급진전되었다. 그 결과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남경문 우술임 등 9명이 순교했다.
한편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현석문이 지은 기해박해 순교자료집 ‘기해일기’에 9명의 순교사실을 덧붙여 ‘기해·병오 순교자전’을 편집했다. 1857년 교황청은 이 문헌을 토대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가운데 82명을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했다. 가경자란 시복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주어지는 존칭이다.
조선 교회사상 마지막 박해인 병인박해는 1866년(고종 3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종식됐다. 규모나 가혹함에 있어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이 박해는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미명 아래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을 거치면서 격화되었고 이 기간 조선교회는 초토화되어 순교자만 8000∼2만여명으로 추산된다.【남정률 기자】